마녀의 조건 - 14

열네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01


언제나 사람의 운명이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커다란 사건은 아주 아무렇지 않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어난다. 그날의 일을 겪고 난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여자는 자신이 변해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특별히 자신이 변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정 부장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정 부장은 그녀에게 특대호를 하면서 좀 더 자극적인 아이템으로 패션 화보와 함께 남자 연예인들 중에서 뜨고 있는 애들은 다 끌어모아보라는 오더를 들었다.


어떻게 보면 데스크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그 말이 마치 매니지먼트사에 가서 물밑 협상이라도 하라는 말투로 들렸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늘 굽신하며 받아주던 그녀의 정색 어린 표정과 표현에 모두 낄낄대며 기획회의랍시고 반은 수다파티였던 자리가 일순 굳어졌다.


결국 소리를 지르고 책상에 있던 모든 것을 내던지는 정 부장의 꼬라지를 보고야 말았지만 결코 여자는 자신이 말 어느 하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악당 마녀의 얼굴에다 대고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건조함 그 자체의 덩어리를 언어화하여 내던지듯 내뱉었다.


“힘든 일이나 일이 아주 많은 건 참고 견딜 수 있지만, 기획사에 가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잡지일을 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리고 전 아무래도 이쪽 일에는 맞지 않나 봐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물론 따라서 달려 나온 정란은 그녀가 단 한 번도 이렇게 매정하게 돌아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 부장의 싸인에 박자를 맞춰 따라 나오긴 했다. 하지만 그날의 그녀는 달랐다. 오히려 정 부장이 개지랄 난리를 치고 자신을 따라 나온 정란이 굿 캅 배드 캅 놀이를 하려는 것까지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심리를 읽어내고 있었다.


원래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었는지 새롭게 장착된 것인지에 대해 깊은 분석까지 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이제까지 보여왔던 행동과 말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가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오히려 PC통신 연재를 통해 한영원의 혹독한 질타를 받고 속상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던 것에 비하면 이런 일쯤은 아무렇지 않은 껌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까지 한 번쯤 해봐야지 하고 꿈만 꿔왔던 통쾌하리만큼 쿨한 결론이었다.


개인 사물이라고 해봐야 특별히 챙길 것도 없었고 대강 커다란 룩섹에 욱여넣듯 챙겨 넣고 패딩 조끼를 덧입고 나오는 그녀에게 정란은 난감한 얼굴로 뭔가 계속 만류하는 말을 내뱉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귀에는 음소거가 설정된 이후였다. 정란의 제지로 차들이 달려드는 큰길로 나서는 그 입구에 잠깐 멈춰 섰지만 그뿐이었다.


“자기야! 수은 씨! 왜 그래? 그냥 기획 회의에서 데스크가 할 수 있는 말이잖아.”

“그건 됐구요, 혹시라도 제가 맡은 건 대강 끝내고 그만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부장님한테도 그렇게 말해주세요. 그럼 대학로 스튜디오로 가서 마무리 할게요.”


그녀의 잘라내는 듯한 말투에 놀란 것은 정란을 뒤로하고 그녀는 성큼성큼 지하철 역 안으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대학로의 스튜디오 촬영을 대강 마무리지어놓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또 늦었다. 하지만 이제 이 일을 정리해버린다고 생각이 드니까 마음이 하나로 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에 내려가기 전 승주가 말했던 정리라는 게 이런 거라면 정리라는 것을 진작에 좀 해둘 걸 싶다고도 생각했다. 그녀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은 일로 이렇게 자신의 일이 한꺼번에 정리될 수도 있다는 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노무 기지배가 미쳤니?”


계단을 올라서는데 익숙한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의 목소리였다.


“엄마가 내 입장이 돼봐 봐. 그게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되나!”


여행을 가서 크리스마스까지 못 올 거라던 은영의 목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집안에서 나는 소리치곤 꽤나 컸다.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할 지경은 아니었지만 계단까지 이런 소음이 들린다는 건, 옆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아주 가까이에서 확성기로 과일 파는 차가 지나가는 수준 이상의 소음일 수 있겠다는 걱정부터 덜컥 들었다. 그냥 들어가기에도 애매한 상황인 듯싶었다.


오늘 여기서 너 죽고 나 죽자! 니 아빠가 젊은 년들 하고 뒹굴고 놀러 다니는 것도 지겨워서 자식들이라도 잘되라고 없는 돈에 유학까지 보내 놨더니 1억이 넘는 돈을 쳐 버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몰래 한국을 들어와? 오늘 아예 결판을 내자! 너 이리 안 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그래?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간 것도 아니고 엄마가 그냥 보낸 거였잖아! 그거 던지지 마! 다친단 말야! 악!”


이모의 성격대로라면 집안의 웬만한 물건들을 모두 박살내고 기운이 다 떨어져서야 이 난리가 끝날 것임을 경험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끼는 홀가분한 기분을 온전히 누려볼 새도 없이 짜증이 솟구쳤다. 같은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집을 떠난 지 몇 달이 지났음에도 한 번도 엄마에게 찾아가 볼 여유도 틈도 없었다. 듣기 거슬리는 이모의 목소리가 엄마를 닮아 있다는 것 때문에 느끼는 감상치곤 꽤나 타이밍이 거슬렸다.


그 난리 법석판에서 벗어나 다시 밖으로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그녀의 앞에 복도의 불이 다시 들어왔다. 206호의 문이 열리고 마녀가 나왔다.


“아니. 정말 너무 하잖아! 어머? 수은 씨 왔네요?”


참다못해 나온 듯 한 그녀는 예쁜 푸우가 그려진 잠옷 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네. 좀 시끄럽네요. 죄송해요. 이모가 오셨나 보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가정교육을 이렇게 요란하게 하기도 또 처음이네. 이렇게 늦은 시간에 확 수위실에다 전화하려다가 수은 씨 얼굴 봐서 참아보려고 했는데, 이 아줌마 장난이 아니네. 풋…!”


여자는 자신의 말이 우스웠던지 말을 하다가 말고 수은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하긴 이 동네에서 조금이라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거나 밤에 피아노 건반 건드리는 소리가 들릴라치면 사람들은 바로 경찰에 전화를 하거나 수위실에 전화해서 애꿎은 수위에게 육두문자를 잔뜩 얹어 닦달해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했다.


수은 역시 중간에서 당하는 경비 아저씨의 모습을 몇 번 본 적도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경비는 누가 더 파워가 있는 사람인가, 혹은 누가 더 자신에게 더 많은 압력을 행사할 것인가를 이미 랭킹처럼 구분해 놓고 있는 사람처럼 기민하게 처신했다.


“그나마 좀 조용해졌네? 수은 씨 지금 들어가면 괜히 싫은 소리 듣겠다. 일루 들어와요. 잠잠해지고 나서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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