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15

열다섯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02


잠깐 잠에서 깬 듯도 한데 화창한 빛이 쏟아져내려 눈이 부시다. 주방에서 뭔가 준비하는 듯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뭘 저렇게 준비하는 거지.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주위를 본다. 화사한 꽃이 있고 레이스가 기둥에 걸려서 사뿐히 내려온 고급스러운 침대.


이렇게 편하게 잠에서 깨어보기는 처음이다. 벽에 걸려있는 시디플레이어의 푸른색 동그라미들이 돌아가면서 보사노바 풍으로 편곡된 크리스마스 캐럴이 나지막이 깔린다. 코끝을 간지럽히던 정체는 달콤한 빵 굽는 냄새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행복감이 느껴진다. 나는 정말 행복에 겨워 나른한 하품을 하면서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고 따뜻한 털이 부숭부숭한 슬리퍼를 신는다. 창가로 다가가 쏟아지는 햇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밖을 본다. 커다란 창 밖으로 소박하게 쌓인 눈이 정원 안에 가득하다. 가지런하게 손질된 정원으로 쌓인 눈과 쏟아지는 햇살은 반짝반짝 보석처럼 어우러져 빛난다. 나는 예쁘게 생긴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춤을 추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잠옷을 입고 있다.


거울이 어디.

화장대로 가려는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입안 가득 함박 미소가 지어진다. 그가 들어온다. 접시에 막 만든 캐러멜 그득한 프라푸치노와 빵과 과일을 들고는 들어온다.


“일어났어? 얼른 먹고 나가자.”


얼른 나가자는 그이의 중저음을 들으며 나는 행복한 미소로 오렌지를 입안으로 넣는다. 상큼한 오렌지 향과 육즙이 입안 가득 쏟아진다. 그렇게 침대에서 비스듬히 앉아서 그의 접대를 받는 것이 너무도 편안하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아참! 잊을 뻔했다.”


그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손을 내민다. 주먹을 쥐었다가 다시 손을 한 바퀴 돌리고 내미는데 작은 선물 상자가 손에 들려있다.

와, 하는 탄성과 함께 나는 그것을 받아 든다. 그이는 늘 나에게 뭔가 전해줄 때 마술을 함께 보여주곤 한다. 그이가 눈으로 얼른 포장을 풀어보라며 웃는다.


너무 예쁜 장미 모양에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브에 먼저 받으니까 기분이 어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함박 미소로 고개만 끄덕인다.

거울이 어디.

화장대 앞으로 달려가 얼른 목에 걸린 장미를 보고 싶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만다.


“아아아악!”


거울 앞에 웃고 있는 것은 웃고 있는 마녀의 얼굴이었다.

얼굴에 사마귀가 나 있고 코는 매부리코에 눈이 찍 찢어져있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나의 얼굴을 보고 계속해서 거울 속의 마녀는 켈켈거리며 웃고 있다.

마녀의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퍼지는 듯한 느낌에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꿈이었구나.

꿈이었다는 사실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쏙 빠져나간 듯 멍하기만 하다. 온몸이 흠뻑 젖어 옷이 몸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한 느낌까지 든다.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본다. 방은 변함이 없다.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커튼을 두 겹 모두 친 내 방의 모습은 그대로이다. 커튼을 젖히자 화사하게 햇살이 쏟아져 흘러들어온다.


언제가 보았던 것과 똑같다. 밖은 지난번 내릴 눈이 남은 자국이 선연하다. 이마에 흐르던 식은땀을 닦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욕실로 들어선다. 거실과 집안은 어제의 전쟁터 그대로였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옷을 하나하나 벗어 빨래통에 집어넣는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걸 보면 악몽이 어지간했었나 보다. 욕조에 들어가 머리까지 물속에 넣고 숨이 찰 때까지 물속에 있어보니 조금은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왜 하필이면 그였을까.

문득 꿈속에서 자신의 남편이었던 그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오르려고 한다.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목소리나 그 모습들. 분명히 마녀의 집 앞에서 몇 번 만났던 그가 틀림없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은 남자가 뜬금없이 남편으로 등장하는 꿈이라니, 꿈 치고는 너무 고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인가.

결혼이 정말 하고 싶어진 건가.

따르르릉릉-

전화벨이 울린다. 타올로 몸을 휘감아 움켜쥐고서는 얼른 뛰어나와 전화를 받는다.


“응. 수은이니? 나다.”


이모였다. 이모의 분노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해 보였다. 내가 은영일 받아준 것이 미리 계획된 것도 아니고 자신의 딸이 얼마나 극성인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엄마의 입장으로 내게 딱히 뭐라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은영이 지 친구들하고 놀러 간다고 스키장에 갔을 게다.”

“들었어요.”

“집 좀 치우고 정리해야 할 거다. 청소하는 아줌마 불렀으니까 괜히 다치지 말고 그냥 둬라. 뭐 벌써 치웠으면 어쩔 수 없고. 가구들 몇 가지 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거 있으면 미리 얘기해라 오늘 보낼 참이니까. 그리고 너 너무 늦게 다니는 거 아니니? 어제도 그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고… 하기사 그때 들어왔어야 좋은 꼴 못 봤을 테지만…, 하여간 좀 일찍 일찍 다녀라. 너 잡지사 다닌다며? 나랑 약속까지 하고서 그런 거 해도 괜찮은 거냐? 돈이 필요한 거라면… 이제부터 세금하고 생활에 필요한 건 내가 대주기로…”

“잡지사 일은, 그만뒀어요.”

“응. 그래?”


이모와의 대화를 몸에 물기가 흐르면서까지 지속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모! 저 약속 있어서 나가봐야 돼요. 나중에 은영이 돌아오거든 그때 얼굴 보고서 또 얘기해요.”


일방적으로 그렇게 전화를 먼저 끊었다. 전화를 끊고서 나갈 준비를 한다. 차분히 앉아서 거울을 마주 보고 있었던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딩동-

“네?”

“택배 왔습니다. 여기 정 수은 씨 댁이죠?”


택배? 그런 것이 나에게 올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우리 집 주소에 내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인을 해준다.

“그럼 즐거운 성탄 보내세요.”


문을 닫고 묵직한 선물 상자를 탁자에 놓고서 가만히 뜯어본다. 발신인에 이름이 쓰여 있지 않은 것이 마음이 걸린다.

혹시라도 잘못 배달될 거라면.

상자를 여니 고급스러운 정장과 향수병이 담겨 있다. 그리고 카드 한 장.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라고 커다랗게 장식된 카드를 보고서야 나는 이 엉뚱하리 그지없고 생전 내가 받아볼 일 없을 선물이 마녀에게서 온 것임을 직감한다.

수은 씨!

생일 축하해요.


예수님하고 생일이 똑같을 뻔 한 걸 보면 수은 씨도 뭔가 큰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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