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번째 이야기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03
남자는, 한영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남자는 우리를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특급 호텔 귀빈실로 데리고 갔다.
난 그 사람의 소개를 받았을 뿐인데도 그녀가 옆에서 얘기하는 소리에 전혀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이 ‘한영원’이라고 해서 그가 나의 선생님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렇게 멋진 메르세데스를 기사까지 두고 다니면서 타고 저런 풍모를 풍기는 사람이 선생님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또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계속 그가 혹시라도 선생님이라면 어쩌지, 하는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머리가 멍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다 왔어요. 수은 씨.”
호텔의 환한 로비를 보면서 문을 열고 서 있는 벨보이가 보였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무슨 밀실같이 조용한 곳이었다. 처음 들어가 봐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냥 툭 터진 식당이 아니고 한쪽 벽면이 온통 탁 트인 통유리로 되어 있는 그 밀실은 아마도 드라마에서나 보았음직한 상류층 사람들이 찾는 그런 파티장이려니 싶었다.
“수은 씨! 그 옷 정말 잘 어울린다. 공주님 같아.”
“네?”
여자는 내가 입고 있는 옷을 보면서 너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입어보고 사야 하는 건데 그래도 명색이 선물인데 그럴 수 있어야지. 수은 씨 성격에 그냥 같이 가자고 해서 선뜻 나설 것 같지도 않구…, 어쨌든 정말 잘 어울려서 다행이다. 영원 씨 예쁘죠? 수은 씨?”
“응? 응. 그렇군.”
여자는 남자에게 동의를 구했다. 남자는 다시 나를 한 번 더 지긋이 바라본다. 내 모습을 보면서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꿈속에서 그가 내 남편으로 나왔다는 걸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너무 감사해요. 이런 선물 함부로 받는 게 아닌데…”
그저 그녀를 보며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럼 뭘로 하실 건지…”
얘기 중간에 노크소리와 함께 중년의 제비 같아 보이는 웨이터가 들어왔다. 웨이터라기보다는 지배인에 가까운 듯해 보였는데 그와 그녀를 보며 익숙한 눈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인 듯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두 분 모두. 그런데 예약하신 건 두 분이신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됐어요. 알아서 맛있는 걸로 준비해주세요. 특별한 손님이니까.”
여자가 먼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렇게 하지. 예약해둔 걸로 세 사람껄 준비해주지.”
남자의 말투는 아주 부드러운 음성과는 달리 안으로 힘이 느껴졌다. 여자에게 선물을 꺼낸 건 그 타이밍이었다. 남자가 지배인에게 이것저것 얘기를 하고 있는 동안 테이블 아래로 아까 샀던 선물 가게의 오르골을 가만히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샀는데 별 거 아니에요. 선물해주신 것보다 훨씬 못한 거라…”
나는 왠지 선물 상자를 테이블 위로 꺼내 그의 눈에 띄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선물 받은 옷과 향수에 대해 얼른 보답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고 내밀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얼른 내밀었다. 속으로는 그녀가 모른 척 얼른 백안에 넣어두고서 나중에 펼쳐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마녀의 탄성은 문을 닫고 나가는 지배인이 돌아볼 정도로 컸다.
“어머! 내 거예요? 수은 씨도 참! 뭐 이런 걸 다 준비했어요? 기분 좋네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다 받고…, 뜯어봐도 되죠?”
남자까지 관심을 보이는데 내가 적잖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는 싫었다.
“별 거 아닌데…”
선물을 뜯어본 그녀는 이제 탄성이 아닌 입을 크게 벌린 아이처럼 아무런 말도 못 한다.
“어쩜. 나 오르골 정말 좋아하는데…”
그제서야 나는 왜 그녀와 오르골이 어울릴 것이라고 확신했는지가 생각났다. 거실에서 주방으로 이어져 있는 장식장에 여러 개의 향수병과 같이 놓여 있었던 것은 바로 오르골이었다. 그때 무심코 봤던 것이 내 뇌리에 남아 그녀와 오르골이 어울린다는 이미지를 형성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그나마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맘에 드세요?”
“잠시만요…”
여자는 조심스레 상자를 연다. 수선화가 피어오르는 듯한 모양을 하고 돌고 그 안에서 음악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남자는 여자의 모습을 보는 건지 아니면 오르골을 보는 건지 것도 아니면 창밖을 응시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한 방향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남자에게서 확인할 것이 있었다.
“저기… 성함이 제가 알고 있는 분하고 같으시네요.”
오르골을 보며 어쩔 줄 몰라하던 그녀와 가만히 밖을 응시하는 것 같았던 그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모아졌다.
“아! 수은 씨 또 엉뚱한 생각 했구나. 우연이예요. 이 사람은 글 쓰는 거 전혀 꽝이니까… 법대 출신인걸!”
남자가 뭔가 막 이야기하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건 내가 착각한 걸까?
여자가 한 발 앞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착각을 교정해 주었다.
그러면 그렇지.
안도였는지 아니면 황당한 기대가 깨진 것에 대한 허탈함이었는지 바람이 푹 빠져버린 풍선처럼 피식 웃음이 터졌다.
“법대 출신은 글을 쓰면 안 되기라도 한다는 건가?”
남자가 투명해 보이는 맑은 물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마녀를 바라보며 장난기스럽게 물었다. 여자의 표정은 정말 도통 내 머리로는 알 수 없는 많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 묘하게 바뀐 것 같았는데 뭐랄까 정색을 한다고나 할까. 아까 보았던 어린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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