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조건 - 17

열일곱 번째 이야기

by 발검무적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2004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첫’이라는 단어가 주는 설렘을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그녀는 가만히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유니폼이 지급되니까 굳이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거니 생각하긴 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지 막상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어젯밤에서야 깨달았다. 어차피 회사를 들어가고 나올 때는 자신의 옷을 입고 다녀야 한다는 간단한 논리조차도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을 탓할 시간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녀와 함께 나갔던 작년의 남대문 쇼핑에서 연미가 직접 골라준 몇 벌의 간단한 옷들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하철 창으로 비춰지는 모습이 그닥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마녀의 선택은 언제나 정확하고 엇나가는 법이 없다.


어딘가 일정한 시간에 맞춰 매일같이 나가고 돌아오고 한다는 것이 이렇게 긴장된 생활일 것이라고 느껴보기는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다. 최소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이렇게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한참이나 까먹고 있었던 감각임에는 틀림없었다. 지하철을 막 내리려는데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막 덮은 책이 눈이 띤다.

- <그녀, 우츄프라카치아>, 한영원의 신작 장편소설.

그가 작년 말에 새로 발표한 장편 소설이었다.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이미 문단과 평단에서는 또다시 장안의 화제를 모으며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화제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들은 바로는 벌써부터 드라마로 만드네 영화로 만드네 하면서 시끄러운 것이 꽤 신선한 내용이지 싶었다. 하긴 늘 새로운 주체나 새로운 양식으로 독자들에게 재미거리를 주었던 그의 성향으로 보건대 또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퇴근길에 서점에라도 들러봐야지,라고 맘을 먹는 것으로 즐거움을 남겨둔다.

그에게 소설 지도를 받지 못하고 시간을 보낸 지가 얼마나 오래된 걸까.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메일을 보낸 것이 끝으로 그와의 연락이 잠시 끊겼다. 그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제자로써 독자로써 그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한 모습이라는 자책이 들어서도 그랬지만 궁금한 것을 채 물어보지도 못하고 늘 자신의 일만 부탁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앞서서였다.

“좋은 아침. 잘 어울리네요.”

송수진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팀장은 ‘비서’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유니폼을 입고 있지 않은 그녀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대조되는 것 같아서 유니폼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자아. 여긴 오늘부터 우리 팀에서 같이 일하게 된 정 수은 씨. 인사하세요.”

“안녕하세요. 정 수은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들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몇몇 남자 직원들까지 눈에 띄는 것을 보고는 다소 주눅이 든다.


“자! 회장님이 출장 중이시니까, 회장님 업무 쪽은 차차 익히기로 하고, 이번에 우리가 투자했던 개봉 영화에 대해서 영화사측하고 미팅을 해야 하니까 자료 읽고 준비하세요. 정 수은 씨 자리는 저쪽! 나머지 사람들도 연말에 놀던 기분은 이제 정리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실수 없도록 하세요. 특히 김 은주 씨! 잠깐 나 좀 따라오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여럿을 보면서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실장은 미팅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수은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이름이 달린 명찰을 가슴에 달면서도 한편에서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던 여직원들이 영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여자들끼리 지낼 경우에 생기는 소문이나 질시 같은 것은 생각보다 사람을 피곤하게 할 수 있다는 송 팀장의 설명을 상기하며 그녀는 자기 자리로 돌아와 자료들을 챙겼다.

삐삐-

삐삐가 울렸다. 회사에서는 삐삐를 가지고 다니면 안 된다는 설명도 들었던 터라 황급히 음소거 버튼을 찾아 소리르 무음으로 돌렸다. 잘 모르는 번호가 찍혀있었다. 당장 전화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삐삐는 꺼둔 채로 책상 서랍에 넣어둔다. 이것저것 책상 서랍을 챙기고 누군가 챙겨줬을 사무비품들도 하나하나 다시 손에 익도록 자리를 정리한다. 자료를 보니 생각보다 방대한 일을 비서실에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홍보실 쪽에서 맡아야 할 것은 새로 개봉하는 영화에 대해 투자를 한 투자사 입장에서 어떤 요구를 할 수 있을지와 영화사나 수입사 측과의 미팅에서 어떤 것들을 챙겨서 자신이 보좌하는 사람들을 서포트해야 할지가 중요 업무인 듯했다. 일단 시킨 대로 자료를 정리하고 보기 좋게 묶어나가는 작업부터 들어갔다. 한참 자료 정리를 끝낼 무렵 점심시간이라고 식사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은 씨! 같이 갈래요?”

옆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말을 건넸다.

“네.”


수은은 처음 무리에 들어갔을 경우 그들과 뭉치려면 무엇보다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그들의 모임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대학 때는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들과 얽히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자의적 거부로 일관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수은 씨 특채라면서요?”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눈이 마주쳤던 그 수근덕거리던 여직원이 먼저 말을 건다. 직원식당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많이 내려와 있었다. 회사 점퍼를 입고 있거나 여직원들의 경우 비서실뿐만 아니라 모두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 네.”

“정말이었구나. 그거….”


그녀의 반응을 보며 순간 옆에 있던 여직원들이 또 자기들끼리 웅성댄다.

“호, 혹시 특채가 제가 처음인가요?”


수은이 묻자 식판을 들고 옆에 있던 은주가 말했다.


“처음이라기보다 원래 우리 회사는 특채 같은 거 없거든. 수은 씨는 몇 학번이에요?”

“89학번이에요.”

“그럼 앞으로 말 편하게 할게. 난 87학번이거든.”


아까 팀장에게 불려 갔던 은주가 심드렁하게 앞서 나아갔다. 수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정이 다가왔다.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말투가 저러니까… 우리 기수 중에는 젤 언니거든요.”


식판을 가지고 자리에 앉고 나서 여정은 왜 수은에게 여직원들이 자신을 보면서 그렇게 수군거렸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일종의 회장의 낙하산이라고들 생각하고 있어요. 수은이가 우리 비서실에 오게 된 거.”

“전 이 회사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걸요. 그리고 학교 쪽으로 교수님 추천이 됐다고 해서 사보사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오게 된 거예요. 비서실장님이 연락하셔서…”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고, 하여간 수은 씨 같은 케이스가 일절 여긴 없었거든요, 이제까지. 수은 씨가 누구 낙하산으로 떨어진 건지 내기하는 애들도 있을 정도니까 말 다했죠 뭐. 그래도 신경 쓰지 말아요. 그러다가들 말 거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런데 정말 비서실장님이 전화까지 했으면 학교 추천이 굉장히 센 건가? 신촌 출신이 드물긴 한데... 비서실장님은 우리도 직접 얘기 나누기 어렵거든요.”

“네에.”


입이 목으로 넘어가는 건지 어디로 넘어가는 건지 여간 입안이 깔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점심식사를 마치고 먼저 올라온 수은은 아까 왔던 삐삐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점심시간은 꽤 남아 있었다.

“여보세요. 저 삐삐 치신 분…”

“나야. 승주.”

“오빠. 어디예요?”


작년 마지막 날 잠깐 인사동에서 만난 후로 처음 통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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