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역사를 흡수하는 자세

by 발검무적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 2대를 거울로 삼았으니, 찬란하도다, 그 문이여!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이 장은 특별한 내용이랄 것은 없다.

공자가 유독 애정하는 주나라를 따르고 싶다는 내용을 강조하면서 그 근거로, 주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를 거울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전부터 강조했지만, 특별할 내용이 없이, 그저 <논어>에 실린 글은 한 줄도 없다.

고문을 공부하는데 있어 역사공부는 필수이다.

옛날 공부하는 이들에게 있어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은 따로 떨어져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

지금의 '통섭'이 주목받기 이전부터 이미 동양학에 있어서 이 세 가지는 하나였고, 그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완성된 학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유학 고전에서 늘 언급되는 하, 은, 주 3대에 대한 내용과 왜 그렇게 공자가 주나라를 애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봄과 동시에, 역사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보고자 한다.

하왕조 우왕의 아들 계

요순시대 천자였던 순(舜)이 우(禹)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우에 의해 하(夏) 왕조가 세워졌다. 하왕조 이후 이어지는 상(商)·주(周)를 합하여 흔히 '3대'라고 병칭하며, 고문에서는 이 3대가,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 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어 고고학적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나라 이후이다. 하지만 하(夏)는 그 존재 자체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을 뿐이지 전승되는 중국 최초의 왕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하(夏)는 우(禹)에서 걸(桀)까지 17 왕 472년 동안(BC 1600년 무렵까지) 존속되었다.


《사기(史記)》〈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임금은 순임금 때 아버지 곤(鲧)이 치수(治水)에 실패하여 죽임을 당한 후 그 위업을 물려받았다. 드디어 13년의 노력 끝에 치수에 성공하여 순임금이 죽은 후 부족 연맹의 수령이 된다. 우는 제위를 요와 순임금의 '선양(禪讓)'방식의 왕위 계승 제도에 따라 동이 부락의 '익(益)'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고, 계(啓)가 익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하왕조가 충분한 고증이 되지 않았음에도 최초의 왕조로 인정받는 것은 그 체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에 있다.

늘 그렇지만, 왜 그 왕조가 무너지게 되었는가는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하왕조의 마지막 왕인 걸(桀)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궁전과 누각을 증축하여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주변 종족들을 유린하고 포악 무도한 정치를 일삼다가 결국 상족(商族)에 의해 멸망한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은 바로 그의 사치생활과 음탕한 생활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그에게는 애첩 '말희(妺喜)'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걸왕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다.


하루는 말희가 걸왕에게 "매번 술을 따르고 음식을 나르는 일은 재미없고 지루하오니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어 춤추고 놀면서 바로바로 마시고 먹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걸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뿌리치고 주지육림 공사를 하게 하여 그 사치와 방종은 극에 달했다.

『고본 죽서기년(古本竹書紀年)』이라는 책에 따르면 하나라는 우임금부터 걸 임금에 이르기까지 471년의 역사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나라는 결국 걸(桀)에 이르러 상나라의 탕왕(湯王)에 의해 멸망당한다.

상나라를 건국한 탕왕

상(商)은 문헌에 따라 은(殷)이라는 명칭도 나타나 한때는 국가의 명칭을 은(殷)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은은 상왕조의 마지막 수도일 뿐이며, 은(殷)이라는 명칭은 상 왕조가 멸망한 뒤 주(周)에서 상의 주민들을 낮게 호칭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명칭은 '상(商)'이다.

앞서 살펴본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가 아직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지 못한 반면, 상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 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實在)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은허에서 발굴된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갑골문자'이다.

상나라는 건국 이후 전기에 국력은 회복되는 듯했으나 무정(武丁) 시대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제30대 왕인, '신(辛)'이 즉위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바로 하왕조의 걸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주(紂) 왕이다. 주왕은 성품이 포악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인물로 정사를 돌보기보다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또한 그는 '달기(妲己)'라는 미인에게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사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했다. 포락(炮烙)의 형벌은 그의 이런 성품과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형벌은 불바다 위에 구리 기둥을 걸쳐놓고 죄수들로 하여금 그 위로 건너가게 하는 형벌이었다. 그 구리 기둥에는 미끄러지기 쉽게 기름을 발라두었으며 그 미끄러운 기둥을 건너는 자는 죄를 면하게 해 준다고 하여 그것을 즐겼다. 심지어 그는 충심으로 간언하는 왕자 비간(比干)에게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하던데 네 심장도 그런지 한 번 보자"라고 하면서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이렇게 잔인하고 포악한 정치를 하던 주(紂) 왕은 목야(牧野)에서 주나라의 군대와 일전을 벌여 패배한 후, 주족(周族)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녹대(鹿臺)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그 속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게 된다. 주(紂) 왕은 하나라의 걸(桀) 왕과 더불어 '걸주(桀紂)'라 불리며 폭군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주나라 문왕의 초상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은 아버지를 문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천명을 받들어 '천자'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후 그는 공신과 친족들에게 그 공에 따라 상을 내리고 봉토를 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예를 들면 태공망 여상에게는 제(齊) 나라를,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에게는 노(魯) 나라를 봉토로 주었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봉건제도이다. 봉건제도란 나라의 영토를 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나누어 왕이 통치하지 않는 나머지 영토를 친족과 공신에게 나누어주던 제도이다. 토지를 받은 제후는 왕실에 공물을 바치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야 했다.

주나라의 봉건제도

주에서는 왕을 천자(天子)로 명칭하였다. 왕을 '신의 아들'로 설정한 것이다. 천자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항상 백성을 어진 마음으로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되었다. 주나라 사람들은 천자를 중심으로 천자를 모신 제후들과 백성들까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봉건제가 출발하게 된다.

고문에서 늘 말하는, '천자는 어버이로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백성은 제후와 천자를 어버이처럼 모셔야 한다.'라고 개념은 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주 무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사람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낚시꾼을 부를 때 일컫는 강태공이다.

자신을 무능하다 버린 아내를 내치며 말한 '覆水難收'의 고사 주인공, 강태공

하지만, 이런 이상적인 정치 제도인 봉건 제도도 왕의 힘이 약해지면서 문제점을 드러냈다. 제후들의 나라가 왕을 섬기면서 든든한 담이 되어 주나라를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던 장점이, 왕의 힘이 약해지면서 제후들이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참람된 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시작은 늘 성대하였으나 끝은 초라하고 지저분하긴 마찬가지였다.

주나라는 태평스러운 성왕, 강왕의 흥성 시기를 거친 후 유왕에 이르러서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미녀 포사(褒姒)에게 빠져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인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포사는 웃음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유왕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비단을 찢는 소리를 내게 하기도 하고 자주 봉화를 올려 제후와 병사들이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반란군이 쳐들어 왔을 때는 구원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후족과 견융족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신후족에 의해 원래 태자였던 의구가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그러나 물러갔던 견융족이 계속 변방을 침공하고 호경을 위협하자 평왕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시대를 동주(東周) 시대라 하고 그 이전을 서주(西周) 시대라고 한다.


이것이 간략하게 정리한 하상주,

3대의 흥망 사이다.

한 번쯤 고문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어 조금 길지만 정리해보았다.


자아,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나라를 세워 훌륭한 정치를 한 왕도 있지만 미녀에게 빠져 나라를 말아먹은 왕도 있다. 그들의 역사 전체를 보건대, 결국 이전 왕조를 새로운 왕조가 무너뜨린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왕을 다른 세력이 전쟁을 통해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것을 좋은 선례라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이 과정 모두를 가감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본래의 좋은 의도와 제도는 뼈대를 유지하되, 시대에 맞춰 적용 방식의 변용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대중에서도 공자가 주나라를 우상으로 삼은 것은 왜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나라가 앞선 두 왕조의 역사를 자신이 설명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주나라 이후에는 그러한 방식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왕조를 세운 나라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대통령만 바뀌어도 나라 전체의 제도를 바꾸네마네하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현대에 들어 생긴 일이 아니다.

당파가 다르면 아무리 좋은 의견이고

심지어 자신들이 이전에 주장한 내용이라도

반대하고 나선다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살펴보면

그 전통(?)은 뿌리 깊고 오래된 것이다.


공자의 춘추전국시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공자는 거슬러 올라가 전범으로 삼을 시대를 찾았고, 그가 찾은 것은 처음 기록되기 시작한 왕조라는 것 이후에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온고이지신을 이룬 왕조로 주나라를 찾은 것이다.

무엇보다 주왕조의 그 기틀을 잡고 체계를 만든 방식이 가장 모범이 될만하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흘러버린 역사는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의 시대에,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반성하는 것에서부터 역사공부는 시작된다.

이전에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지금의 잘못을 반성하고 앞으로 그런 잘못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야말로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라 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부분만 떼어서

적당히 인용하려고 있는 것이 역사가 아니란 의미이다.

이익을 함께 하는 자들과 무리를 이루어 언제고

이합집산하고 역사인식과 아무런 상관없이

반대되는 이들의 의견에 쌍심지를 켜고 나서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미래가 보장되어 있을 리가 없다.


역사를 알고, 그 인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

당신이 이런 글을 읽고 공부하며

사색하고 그것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드는 과정을 거쳐 고양시키는 것이,

그저 당신의 지식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닌 것은

당신이 성인의 공부로 수양이 되고 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 발전하려면

먼저 제대로 알고 제대로 배워야 하며

무엇보다 그 공부를 바탕으로

온전한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충분한 사유와 수양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수천 년 전 공자 대신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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