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것을 내보이는 것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묻는다'는 행위가 갖는 무거운 존재감

by 발검무적
子入大廟, 每事問. 或曰: "孰謂鄹人之子知禮乎? 入大廟, 每事問." 子聞之曰: "是禮也."
공자께서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물으시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땅 사람의 아들(공자)을 일러 예를 안다고 하는가? 태묘에 들어가 매사를 묻는구나!"라고 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것이 바로 예이다."라고 하셨다.

태묘는 노나라 주공(周公)의 사당이다. 공자가 처음으로 벼슬할 때 태묘에 들어가 제사를 도왔던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추땅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노나라 추읍(邑)의 대부를 지낸 공자의 아버지인 '숙량흘(叔紇)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아주 심하게 폄하하는 식의 표현이다.


공자는 젊었을 때부터, 예를 잘 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서 혹자가 태묘에서 이것저것 묻는 공자의 행동을 보고 예를 잘 알지 못한다고 비아냥거린 것이다.

이에 대해 공자는 단 한마디로 정리한다.

이것이 바로 예이다.

주자의 설명에 의하면, '공경과 삼감이 지극한 것이 바로 예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혹시라도 주자의 설명이 부족하여 공자의 억울한 오해와 누명을 이해하지 못할까 싶어,

윤 씨(尹氏)는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예는 공경함일 뿐이니, 비록 알더라도 또한 묻는 것은 삼감이 지극한 것이다. 그 경을 실천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를 일러 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자는 어찌 공자를 알 수 있겠는가?"

이 장에서 눈깔자는 '是禮也'이다.

이 말은 짧지만 공자가 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모두 담고 있는 함축적인 말이다.

다른 개념도 그렇지만, 앞서 쭉 살펴본 바와 같이 공자는 '예'라는 개념 역시 고정불변의 고정한 하나의 개념이라고 정립하여 설명하지 않는다. 즉,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고, 사람에 따라 이해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이 고대 문헌을 통해 예의에 대해 많이 알고 공부한 전문가라 할지라도, '태묘'라는 현장에서 지금껏 지내온 사람들과 자신이 도와야 할 위치를 생각할 때, 자신은 이곳에 처음 임하였기에 그 모든 상황과 과정들이 질문을 통해 확인되어야만 한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하는 알량한 지식을 기준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소위 '나대는' 순간, 이제까지 지켜오던 태묘의 제사를 망쳐버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주요한 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무언가를 묻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를 예의 기본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상대가 나보다 윗사람일 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공식적인 행사를 함에 있어 상대방에게 내가 무언가를 묻는다는 행위 자체는 그 사람이 내가 모르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전제에 두고 나에게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그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에게 최대한의 공경을 표시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묻는 행위 그 자체가 예를 완성시키는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묻는 과정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 잘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과정을 기억하고 기록하게 한다.

물음 자체는 행위의 재확인이며, 그 물음을 통해, 어떻게 하는지 어떤 방식인지 등등의 모든 순서와 과정을 예라는 것이 궁극적인 완성을 향해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철학의 사유방식을 '어떤 사람(혹자)'이라고 지칭된 자가 이해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질문은 현대인의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잘났고 다 잘 안다면서 뭘 그렇게 물어?"

고대 문헌에 박식하고 예에 대해 잘 안다고 인정받아 벼슬을 얻게 된 공자에 대한 열등감이 물씬 묻어나는 질문에 다름 아닌가?



라떼... 선자리에 나와서 바로 잘리는 유형을 비꼬는 말로 '삼척동자'라는 단어가 있었다.

'삼척동자'라 함은,

아는 척, 가진 척, 힘센 척하는 이를 의미했다.

이런 삼척동자는 선자리에서 바로 상대에게 잘려버리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중에 으뜸이 바로 '아는 척'이다.


시대가 흘렀음에도, 몰라도 아는 척, 아는 것은 당연히 아는 척, 없어도 있는 척 등등

그런 이들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아예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은 좀 덜한데, 자기가 좀 배웠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이 증세가 가장 심하다.

조금 아는 얘기만 나오더라도 자신이 전문가인척 입을 놀리지 못해서 안달인 빈수레들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세월에 갈수록 느끼곤 한다.


위의 윤 씨의 설명처럼, 비아냥거렸던 어떤 사람은 공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수준에서 봤을 때, 무언가 묻는다는 행위가 갖는 의미는 단 하나.

잘 모르니까 묻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은 언제 무엇을 누구에게 묻는가?


묻는 대상을 봐가면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은 묻는 대상을 봐가면서 묻는다.

저명한 대학교수에게 묻는 것은 부끄럽지 않고,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묻는 것은 부끄럽다고 여긴다.

자신보다 경험이 많은 연장자에게 묻는 것은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은 부끄럽다고 여긴다.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잘 아는 사람에게 묻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윗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대해서도 묻는 것은 '예'라고 하지 않는가?


행간에 감춰져 있긴 하지만,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세상에 나와 모든 것이 새로운 것 투성이인 아이들은 질문이 많다.

엄마에게 늘 무언가를 묻는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지만,

귀찮아진 엄마는 아빠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아빠역시 그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초록창에 찾아보고 그것이 맞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으면서

대강 대답하고 만다.

그들의 자식이 부모에게 제대로 교육을 받고 성장하고 있다고 느껴지는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묻는 아이의 천진난만한 눈을 보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하고 난감해하는 어른들을 보곤 한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같이 찾아보자고 하고 공부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많은 의문과 모르는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왔다.

가장 처음 묻는 질문은 대개 부모님이었다.

그렇게 사회생활이 확장되면서 '선생님'에게 묻고

직접 책을 찾고 전문가를 찾고

인터넷이라는 요물이 나오고 나서는

초록창에 두들기고, 여기저기 쏟아지는 쓰레기 정보 중에서 옥석을 가리는 판단마저 직접 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이 장에서 강조하는 '예'의 근본으로서 '묻는다'는 행위는 '공경함과 삼감'을 의미한다.

즉, 내가 알고 있다 손 치더라도 그것이 이 상황에 맞는지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같은 것인지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내가 틀릴까 봐서 조심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맞더라도 그것이 맞는다고 좋아하지 않고 설사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다면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하고자 다가서고 더 겸양스럽게 물을 뿐이다.


그것이 예라고 단 세 글자로 공자는 알려준다.

당신은 과연 예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서

그것을 행하고 있는가?


당신의 공부가, 당신의 신독(愼獨)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하는 것이,

곧 '예'와 직결된다 하는

이 신기하고도 깊고 깊은 가르침이

조금은 와닿기 시작하는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알고자 노력하고

알고 있는 것이 정말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 늘 회의하며, 알고 있다 확신하더라도 상황과 상대를 보며 그 상대에 대한 공경과 배려를 펼쳐

'제대로' 물을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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