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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30. 2021

잘 몰라서? 힘이 부족해서?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힘이 부족해서라며 변명하는 자들에게.

子曰: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加乎其身. 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 仁을 좋아하는 사람과 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仁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할 수 없고, 不仁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가 仁을 행할 때에 不仁한 것이 자신의 몸에 가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루라도 그 힘을 仁에 쓴 사람이 있는가? 나는 힘이 부족한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노라.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을 터인데 내가 아직 보지 못하였나 보다."

이 장에서는 비슷한 표현이 많이 반복된다. 그런데 그 뜻이 모두 하나의 뜻으로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조금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념에 해당하는 仁과 不仁에 대하는 태도를 주제로 삼고 있는데 그 이해와 태도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자.

仁을 좋아하고 不仁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그런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너무 당연한 사실인데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뭐지, 이건? 말장난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읽어보자.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를 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

이것은 그런 자가 과연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투의 말투인데, 공자 특유의 완곡한 풍자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첫 문장은 당신이 얼핏 보고 이해한 것처럼 당연한 의미의 문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공자는 자세한 설명 없이, 쨉도 없이, 스트레이트도 없이, 그냥 바로 묵직한 훅을 훅하고 날린 셈이다.


게다가,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점을, 그대로 설명하지 않고 그것을 제대로 하는 체행하는 것이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참, 성격 고약한 양반이다.)


仁을 제대로 이해한 자는, 그것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좋은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일이 그것보다 우선시될 수 없다고 여긴다. 不仁이 어떠한 것인지 제대로 인지한 자는, 不仁을 싫어해야 하는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완전히 끊어버려서 조금이라도 그것이 자신이 하는 실수를 없게 하려고 애쓴다.

주자는 이것을 해설하며, '이것은 모두 덕을 완성하는 일이다.'라고 정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도 친절하게 덧붙인다.

의재언외(意在言外); 뜻은 말 밖에 있다.

여기서 仁과 不仁은 적극적 의미와 소극적 의미로 환치되어 설명되고 있다.

즉,  仁을 좋아하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이자 좀 더 상위의 레벨이 보여주는 단계이고, 不仁를 싫어하는 것은, 그 바로 아래 단계이자 조금은 소극적인 의미로 설명할 수 있다.

'선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악행을 하지는 않는다.'라는 정도의 개념으로 비유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여기서 仁과 不仁의 개념에 더해, '좋아한다'와 '싫어한다'는 의미의 '好, 惡'에 대한 대상의 설정도 명확하게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 이번 기회에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자칫 고문 공부를 대강한 자들이, '仁을 좋아하고, 不仁을 싫어한다'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해석하는 것을 본다.

틀렸다.

好, 惡의 의미가 좋아하고 싫어한다는 말은 맞는데, 목적어로 삼는 대상이 다르다.


仁者를 좋아하고, 不仁者를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이다.

그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속에 내재되어 있는 양가치를 의미한다.


그래서, ‘좋아한다 好’란 자기 자신에게 있는 을 좋아하는 것이지, 한 사람을 사랑함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며, ‘싫어한다 惡’란 자기 자신에게 있는 不仁을 미워하는 것이지, 결코 악한 사람을 미워함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다.

처음엔 알려주었는데도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되려 악다구니를 쓰며 이렇게 대들면...

한편, 앞서 설명한 바와같이 이 장에는 ‘我未見;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한 것이 세 차례나 된다.

앞과 에서 사용한 我未見의 의미는 같은 의미이지만, 가운데 사용된 我未見은 그 의미가 앞서 두 개와 같지 않다. 앞서 두 개의 의미는 '과연 그런 자가 있을지 의문이다'정도의 의심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가운데 사용된 我未見의 의미는 대놓고 후려치는 '그런 자는 없었다'의 강한 부정의 강조이다.


힘이 부족한 자는 '결코' 없을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였더라도 배우고 깨달아서 하루아침에 분발하여 仁에 힘을 쏟는다면, 시간이 부족하거나 힘이 부족해서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것은 아니라는 점에 대해 별표에, 당구장 표시에, 온갖 형광펜으로 천연색 도배를 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仁을 함은 자기에게 달려있다. 하고자 하면 바로 되는 것이니, 뜻이 지극한 바에 기운이 반드시 이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仁이 비록 능하기 어려우나 이르기는 또한 쉬운 것이다."  
이렇게 얼굴이 날아갈 정도의 충격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가르침을 꽂아줘야 하지 않겠는가?

이 부분 역시 짧은 듯 하지만 연쇄법을 행간에 녹여 점층으로 사용하는 고도의 수사를 사용하는 구절이다.


첫째, 어떻게 해야 하는지조차 알려고 들지 않는 자들은 반성하라.

둘째,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는 자들은, 무엇을 우선시할지 모르는 기만적인 것들이니 반성하라.

셋째, 제대로 모르면서 행하기가 어렵네, 너무 고차원적이네 핑계 대며 행하지 않은 것들은 더욱 반성하라.

넷째, 실제로 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입만 놀리는 자기 위선을 떨면서 제 이익을 챙기기에만 급급한 것들은 얼른 접시물에 코를 박고 인생을 마감하라.

다섯째, 성인군자의 수행을 범인이 어떻게 따르겠는가 어쩌고 해보지도 않고 핑계 대는 것들은 얼른 목을 내밀라.

여기까지만 해도, 제대로 읽은 자들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선생의 일갈에 고개를 숙였을 텐데, 공자는 손속에 인정을 남겨두지 않는다.

미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표면상으로는 의문형의 어법으로 '그런 자가 있을 텐데 나만 보지 못한 것일게다.'라며 단칼에 태만한 자들을 일도양단하는 단호함시연해보인다.


어조사 '蓋', 한 글자가 그 살벌한 분위기를 타노스의 손가락처럼 순식간에 다른 세계로 날려버리는 역할을 해준다.

어조사와 허사들은 고문에서 대개 의미가 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논어>에서 공자가 사용하는 수많은 허사들은 결코 그것들과 다르다. 그 한 글자 한 글자가 저마다 그 무거운 의미를 감추고 서슬 시퍼런 날을 세우고 곳곳에 매복해 있다.


이것은 이전 구절의 의미가 확장되고 증폭된 것이다.

힘을 쓰려고 하는 자도 못 봤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는 자는 있을 수 없다고,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고 없더라는 강조에 이어, 힘을 쓰는데도 이러한 수준이 이르지 못한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양심에 대못을 쾅쾅 마구 아댄 것이다.


내가 감사업무를 하는 경찰청 본청의 썩은 경찰들을 꼬집을 때 했던 말은, 바로 이 어법의 패러디이다.


"내가 이제까지 경찰이 잘못된 부분을 이리도 많이 지적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라고 기회를 수차례 주었음에도 나는 단 한 번도 그것을 바로 잡는 제대로 된 경찰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어딘가에서 묵묵히 자신의 양심을 걸고 수고하는 경찰들이 많을 텐데 제가 운이 없어 만나지 못한 것이었겠지요?"  


이 질문을 들었던 모든 경찰들 중에서 단 한 명도 제대로 답변을 하거나 전례를 깬 자는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못 만난 것이겠지?


매일같이 <논어>의 한 장씩을 강독하며 배우려고 하고, 스스로를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자기수양에 다름 아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일단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먼저 배워야 할 것이다.

배우고 난 뒤가 아니라, 배움과 동시에, 배우는 자들이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배우고 수양하는지조차 모른다면 배우고 익힐 필요가 없다.


부귀영화를 위해 출세로 가는, 유일한 동아줄 하나 잡아보겠다고 개천에서 발버둥질 치며 죽기 살기로 관악으로 달음박질한 자들이, 돈으로 출세길을 처발라줄 처가를 만나 결국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충분히 목도한 바 있다.


그들을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으로 부른 것이 최초의 누구인지는 내 모르겠으나, 한참 잘못된 표현이다.

그들은 누군가를 지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들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공직을 수행하는 공무원이고, 게다가 제법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고위직이라면 당신의 양심에 대고 한 번 물어보라, 당신이 仁을 행하는 것은 고사하고, 과연 당신의 조직에서 일어난 不仁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지를.


공무원을 예로 들었다고 공무원에 한정한 이야기라고 착각하며 안도하는 당신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이 과연, 정말로 不仁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不仁이 당신을 움직이도록 방치하였는가?

다른 사람의 不仁에 대해, 그렇게 귀신같이 알아보고 침을 쏟아가며 욕지거리를 날렸던 당신이, 당신 자신의 안에 있는 不仁에 대해 얼마나 너그러웠는지에 정말 인지하지 못했는가 말이다.


박노해 시인의 '한계선'이라는 시는, 이 장에서 공자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을 아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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