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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7. 2021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라면 떨쳐버리고 일어날 용기

부정하게라도 부와 명예를얻고자 하는자들에 대한 일갈

子曰: "富與貴, 是人之所欲也, 不以其道得之, 不處也. 貧與賤, 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 不去也. 君子去仁, 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 造次必於是, 顚沛必於是."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함과 고귀함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나 그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으면 (거기에 연연하여) 머물지 않아야 하며, 빈곤함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나 그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 하더라도 떠나버리지 않아야 한다. 군자가 仁을 떠나면 어찌 명예를 이룰 수 있겠는가?
군자는 밥 한 끼 먹는 짧은 시간도 仁을 어김이 없으니 다급해져도 반드시 仁에 처하고 위급한 상황에 빠져도 반드시 仁에 처한다."

이 장의 머릿 사진에는, 이 장에서 눈깔자가 아님에도 빈곤함과 천함에 대해 쓴 부분(貧與賤 人之所惡者也)만 적은 분의 묵서가 있다. 굳이 이 장에서 이 부분을 적었을 당시의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매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하고 올라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는 것은 거의 조건반사처럼 되어버렸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엽서(일본 도쿄 메이지대학 소장)

논어강독을 하면서 유독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삽화에 넣은 것이 많았다는 것을 눈치챈 독자가 있길 바란다. 왜 굳이 안중근 의사는 그렇게 논어의 구절들을 적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이 긴 장에서 굳이 그 구절을 적었을까?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주자는 이 장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시작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는 것은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얻음을 말한다."

방점은 뒷문장에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그 방법이 부정했다고 탓하는 것을 건너뛰어 결론부터 못을 박는다.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될 것

더 긴 말도 부가적인 수식도 필요 없는 말 그대로 그래서는 안 될 것이라고 규정한다.


부귀를 탐하고 빈천을 싫어하는 것은, (굳이 이 표현을 자꾸 쓰는 것이 거슬리지만) 인간의 본능이다. 하지만 본능대로 산다면 짐승과 구별할 수 없지 않겠느냐는 단순 명료한 논리에 의해 인간이기에, 당연히 본능을 절제하고 조절해야만 한다.

하물며 仁을 이루고 군자가 되려는 수양하고 이름을 이루겠다는 목표를 가진 자라면, 그 정도의 사리분별은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세부적인 사항으로 들어가 설명을 이어간다.

밥 한 끼 먹는 일상적인 그 짧은 시간에도

급하고 구차한 상황이 벌어진 때에도

너무도 위급해서 당혹스러운 때마저도

그 仁은 있다가 없다고 하는 개념이 아님을 강조한다. 

공자를 너무도 스타일리시하게 표현했던 주윤발 주연의 영화 <공자>

훈고학적인 해석을 조금 가미해서 이 부분이 왜 공자만의 특별한 문장인지를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위 해석을 자연스러운 일반인의 화법으로 써보라고 하면, 아마도 “만약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으면 처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라고 쓸 것이다. 벌어지지 않은 가정이고 강조를 위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만약 若’과 ‘비록 雖’ 두 글자를 쓰는 것으로, 그것은 말 그대로 특별한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늘 있는 일이 아닌 특별하게 가정하는 상황으로 한정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치 '저 부귀에 대해서는 부러워하고, 이 빈천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점'을 대조적으로 부각시켜 쓰는 문장을 위한 문장이 되어버리고 만다. 특별한 상황이 아닌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세태를 꼬집은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다르다고들 하는 것이다. 성인이 말씀하시면 경전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이다.


자연스럽고 매끄러워 보이게 하는 이 두 글자를 쏙 뺌으로서, 실제야 어떻든 간에, 부귀를 본래부터 소유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여겨서 그것이 내가 정당한 노력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굳이 처하지 않고 떨쳐버리고 일어나며, 빈천에 대해서도 그것이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핑계 대지 않고 모두 내 행동의 결과라 여겨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을 담아낸 것이다.

수천 년 전인 당시의 사람들도 지금의 현대인 못지않게 그렇게 똑같이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자는 한 글자를 빼고 넣더라도 이렇게 의미의 차이를 크게 만들어 알아들을 자들에게 그 자리에 주저앉을 정도의 감탄을 안배해놓은 것이다.

명품을 입고 신어야, 신상 외제차를 타고 다녀야, 강남의 노른자위의 넓은 새 아파트에 살아야 대접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이젠 '우리'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게 할 정도로 많아졌다.

그것이 진정 '우리'라면 나는 태생부터 반골기질인지라 '그들'에 속하지 않는다.

장신구 따위로 내 격을 높일 생각을 하는 자들과 같은 공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불결하다고 여겨 심각한 청결벽을 보였던, 유난스러운 젊은 시절을 보냈더랬다.

그렇게 그 시절을 지나 다시 논어를 읽으며 세상을 관조하니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달라져 있었고 내가 읽는 <논어>는 한 글자 달라지지 않았지만, 읽어낼 수 있는 행간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가 보였다.


누가 부귀를 싫어하겠는가마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면 굳이 탐할 필요가 없고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강남 한복판을 찬찬히 걷다가 문득, '왜 이 노른자위 땅에 내 집은 없지?', '나는 이제까지 뭐하고 살았지?'라고 생각하며 자기 인생을 낭비한 것 같고, 다른 이들이 성과를 이루는 동안 나만 정체한 것 같다고 화가 나고 속상해지는가? 

공자는 이 장을 통해 말한다, 그러지 말라고, 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

그런데 대조가 아닌 이어진 뒷 문장이 생경하게 읽힐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안중근 의사가 써 내려간 바로 그 문구가 포함된 부분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중에서 비단과 종이엔 운필한 것은 많아도 뤼순 감옥 관내에서 사용되었던 용지에 남긴 작품은 희귀작에 속한다.

가난하고 천함은 사람들 모두가 싫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환경에 있거나 다른 이에게 있다면서 핑계 대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본래 이 장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두 가지의 단계를 보여주는데 두 번째가 훨씬 더 높은 단계임을 보여준다.

첫 번째 단계, 부귀함이 본래 갖추고 있었던 사람처럼 내가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니면 떨치고 일어나버린다.

두 번째 단계, 빈천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환경이나 다른 사람에게 핑계 대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안중근 의사는 나라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서른도 되지 않아 자신이 곧 사형이 될 상황에 처한 것에 대해 아주 담담하게 그저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곧, 仁者이고 君子라는 공자의 가르침을 모두 읽어내고서 저 머리글로 자신의 마음을 다시 가다듬은 것이다. 1910년 3월이면 처형이 집행되기 불과 며칠을 앞둔 상태였다.

정당하게 노력하여 자신이 얻어낸 것이 아닌 것을 얻게 될 경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이를 본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오히려, 부정한 방법으로 어떻게 해서든 부와 귀를 얻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들의 모습들로 뉴스가 가득 차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그것조차 일상이 되어버렸다.

대학을 다닐 때 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부르짖던 선배나 동기들은 이제 정치꾼이 되어 그들의 기름진 배를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버려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들을 욕하고 떠드는 유튜브에 코를 받은 이들은, 자신들은 선량한 서민이라면서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며 강남은 고사하고 서울에 집 한채만이라도 얻을 부정한 방법이라도 없는지 혈안이 되어 지들끼리 정보랍시고 날마다 카톡의 정보방에 기웃거리며 다닌다. 

정권에 기대어 저와 지 식구들의 배를 불리던 이들은, 나중에 형세가 뒤바뀌어 심판을 받을 상황에 처하게 되면 자신들은 정쟁의 희생양이며 자신들이 했던 일은 주위에서 다반사로 하는 일인데 자신들만이 억울하게 처벌당하게 되었다며 돈을 처바르고 법비들을 내세워 집행유예라고 빠져나와 다시 그 구린 인생을 재가동한다.

서른도 되기 전에 그 어느 누구의 선동이나 설득에 의해서도 아닌, 자신의 신념에 의해 목숨을 아깝지 않아 하며 조국에 바쳤던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그런 쓰레기들이 언급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은 이 장에서 공자가 일러준 내용을 공부하며 그것을 체행하려고 했던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단 말인가?

仁者? 君子?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안중근 의사는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며, 그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스스로 자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그것은 담담한 일상이었을 것이고,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이것은 분명히 심한 욕이다.

그저 사람답게 사는 것이

그대들에게 그리도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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