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 알바가 소개해준 사람은 나름 진정한 의미의 친한파였다. 한국의 홍수피해가 있을 때 없는 살림에 100만 원을 모아 언론사를 통해 성금을 보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그는 그놈과의 악연을 곱씹으며 마른기침을 수십 번 내뱉었다.
그는 한국과 대만이 정식 수교를 하고 있던 시기 부산의 대만 영사관에서 근무를 오랜 시간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놈이 한국에 유학생으로 잠입하여 한국을 활용하여 지금의 위치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을 곁에서 보고 들은 장본인이었다. 놈이 80년대 한국의 특파원 시절부터 그를 지켜보았다는 외교관 출신의 화교에게서 들은 그놈에 대한 진상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사실 그놈은 카메라 알바 출신이었어. 대만 대학에서 한국어과를 다니던 시절부터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이것저것 사진을 찍어서 신문사에 넘겼던 것으로 유명했지. 당시 대형 언론사라고 일컬어지던 <연합보(聯合報)>에 들어간 것도 그렇게 사진을 팔다가 판로를 개척한 거지, 기사를 작성하는 정식 기자가 아니었어. 한국에 파견되게 된 것도 한국어과라는 이유로 어눌하긴 했지만 한국어가 된다고 우겨서 들어가게 된 것이지 제대로 된 기사 작성이나 사건을 분석하는 트레이닝을 받은 녀석이 아니었어. 우연히 한국에 갔다가 이웅평이가 83년에 미그기를 타고 내려온 것을 기사로 보낸 것이 대박이 나서 기자로 채용이 된 거지. 그때 사장이 잘했다고 만 달러를 포상금으로 내려주기까지 했어. 그런데 한국에 있을 때부터도 그놈은 한국에 결코 우호적인 놈이 아니었어. 그냥 기자들이 갖는 기본적인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대해서 상당히 삐딱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녀석이었어. 한 번은 지방 의대에 재학 중이던 여자 화교애가 방송국 시나리오에서 대상을 받은 일이 있었거든. 그런데, 그놈이 대상을 받은 그 작품이 대만의 '경요'라는 유명 소설가의 이야기를 표절한 것이라면서 방송국에 가서 난리를 쳐서 결국 그 여자애의 수상을 취소하네마네 소송을 하네, 현상금을 다시 받아내야 한다는 둥 아주 가관이 아니었거든. 나를 비롯해서, 한국에서 특파원 입네하고 떠들고 다니던 그놈을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놈을 좋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 워낙 잇속에 밝고 남이 잘되는 꼴을 절대 보지 않으려는 놈이었거든.”
연배가 좀 위인 동시대를 한국에서 보냈던 그가 기억하는 그놈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온 인물에 지나지 않은 정도를 넘어선 다소 악의적인 성향이 강한 혐한파였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기 직전에 대만으로 돌아온 그의 이후 행보에 대해서는 뒤이어 술자리에서 합류한 다른 대만 노년 기자에게서 얻어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사람은 기자는 고사하고 언론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들 주변에서 뭔가 콩고물 떨어지면 한 자리해볼까 하는 전형적인 기레기예요. 2000년 즈음에는 정치인들한테 들러붙어서는 자기가 한국통이니까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의 대표로 보내달라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로비까지 펼치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 이유라고 제시했던 것도, 무슨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잘하는 것도 아닌 걸 다들 아니까, 자기가 한국의 다양한 정치인들과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논리였거든요. 내가 누구랑 형 동생 하는 사이라는 둥 누구랑 아주 친해서 맨날 같이 술 먹고 오입질까지 같이 하고 다닌 사이라는 둥.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말도 안 되는 인물이 어떻게 대만에서 방송사 부사장이라는 위치까지 그렇게까지 올라갈 수 있었느냐고 의아하겠지만 타이완은 인력풀이 그렇게 풍부한 편이 아니거든요. 실제로 능력 있는 언론인들은 애초에 중국 대륙 쪽으로 진출했고요. 심지어 최근에 정권 바뀌고 나서 국정운영을 해야 하는데 인물이 너무 없어서 다른 당에서 인물을 빌려와야 하는 일까지 터지는 나라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같잖은 놈이 그런 얼토당토 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최종적으로는 방송국 부사장까지 하던 시절에 온갖 로비에도 비롯하고 결국 사장까지 올라가는 것에 실패하게 되자 그에 대한 앙심을 품고는, 대단한 배신을 하게 되죠. 국민당이던 자신의 정치 태생을 뒤집고 민진당에 들러붙은 사건이었어요. 한국에 비해, 정치인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대만은 정치적인 색깔을 확실하게 가지고 드러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거든요. 신문사든, 심지어 대학교수들까지도요. 국민당과 민진당의 당색이 일반인들에게도 상당히 명확하게 갈려서 드러나는 거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국 부사장의 지위를 당시에 잘 나가던 국민당의 힘을 등에 업고 민진당을 비난하는 것으로 치부했던 자가, 국민당이 힘이 없어지고 약해질 만하니까 다시 민진당으로 갈아타서 예전의 동지였던 이들을 공격하고 비난한다는 건 정말로 아무리 쓰레기여도 정도를 넘어선 것이라고 봐야 맞겠죠. 그건 배신을 당한 국민당도 그랬지만, 민진당측에서도 그놈을 선전도구로 사용은 하되, 절대 중용하거나 가까이할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었어요. 한번 배신했던 놈은 결국 또 배신을 하게 되니까요.”
그가 대놓고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의 대표로 가겠다고 자청할 정도로 대만 정부가 엉성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인 것인지 주한 타이베이 대표부가 한국에 있는지, 왜 대사관이 아니고 대표부인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시대에 누가 대표를 하던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이 한국에 다시 뭔가 감투를 써서 오는 일이 생겼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더 냄새나는 안 좋을 짓을 하고 다녔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은 그가 당적을 바꿔가며 정치판에 기웃거렸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민진당을 지지하는 노 기자는 야당 시절부터 민진당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민진당에 빌붙어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그놈이 너무 역겹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놈이 당시에는 국민당에 뼈를 묻을 것처럼 받아먹을 거 다 받아먹고 지 전성기라고 말할만한 시기를 보내 놓고서는 국민당이 별 볼 일 없어질 지음에 다시 민진당쪽에 붙었다는 거예요. 사실 그놈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방송국 사장이 되는 꿈이 박살이 났는데, 타고 있던 국민당이 기울고 민진당이 뜨고 있으니 국민당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그렇게나 방송국 사장이 되고 싶었는데 능력이 안 된다고 단칼에 밀려나고 보니 칼을 간 거지요. 게다가 부사장직을 하도록 놔두지도 않고 그대로 잘렸으니 더욱더 앙심을 품게 된 거고요.”
그런 그는 민진당 쪽으로 옮기면서 국민당 저격수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그는 갑작스레 ‘대만은 대만이지 중국이 아니다.’라는 민진당이 캐치프레이즈를 확실하게 노선으로 잡고 있었다. 그래서 방송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입법위원들과 늘 관계를 유지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던 여자 국회의원들이 한국인에 대한 문제를 트집 잡고 혐한성 기자회견을 한다거나 하면 마치 지원군처럼 한 패키지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가뜩이나 한국에서 떨어지던 콩고물이 2017년 2월 9일 기사가 게재되던 날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확 끊긴 것도 모자라, 대만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한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자신의 강의실에 한국인과 개는 들어오지 말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던 터였다.
그러면서 지내던 바로 그다음 주에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서울대 출신의 교수가 해당 학과에 부임해왔고, 자신은 그렇게 교수를 시켜달라고 해도 할 수 없었는데, 버젓이 강의를 한다고 부임한 교수가 싫었다.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도 거슬리던 판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도움을 청하니 성희롱으로 누명을 씌우고 싶어 하는 여학생의 도움 요청에 그는 정치판과 방송판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주가를 올릴 수 있는 계기라고 쾌재를 불렀을 터였다.
그렇게 그 교수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난자하고서도 원하는 대로 결과를 얻지 못하자 놈은 칼을 갈았다. 그리고 또 다른 이슈를 찾다가 30여 년이나 80년대에 찍어두었던 한국 민주화 운동 당시의 이한국 열사의 가투 사진을 새로운 유물이라도 찾은 냥 어렵게 어렵게 한국으로 보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의 고혈을 빨고자 하다가 이런 일이 터진 것이었다.
전격적으로 이슈몰이를 해서 기념 사진회를 열고 언론 샤워를 받고 싶어 했던 이한국 열사 기념회의 열망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런 제보를 받고 그에 대한 진상을 알고 나서도, 그놈에 대한 친일 행각과 가치관은 사진과 무관하니 그대로 강행하고 싶어 했던 기념사업회장의 의도가 읽히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 역시 기레기 짓을 하였고, 기레기라는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는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그놈에 대한 뒤를 확실하게 캐고 나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서는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결국 변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사의 기레기들은 자극적이고 이슈가 되는 기사를 원했고, 적당히 밥 같이 먹고 술 먹는 사이의 기념사업회의 관계자가 건네주는 보도자료를 맞춤법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타이핑해서 기사화해주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며, 그 기사의 출처나 친일파를 양산하는데 일조하는 일임을 알게 된 후에도, '내가 한 일이 뭐 그렇게 친일파를 도와준 일이나 되겠어?'라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기자동료들이 나와 같은 공간에서 기사를 타이핑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역겨워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해외 국립대학교 교수라는 타이틀로 적당히 패널 한 자리를 채우고, 뭔가 권위 있는 사람들을 싼 값에 초빙해서 사진의 한 켠을 채우고 행사를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친한파인 양 친일 행각을 하는 놈을 불렀더라도 특별히 그놈에게 용돈을 많이 챙겨주거나 그놈을 적극적으로 스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친일파를 키우지 않았다는 그들의 논리를, 이제는 더 이상 용인할 자신이 없었다.
단순히, 타국에 가서 그놈의 타깃이 되어 누명을 쓰고 만신창이가 되어 인생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상처 받고 돌아온 교수에게, '이건 아니지 않냐?'라고 담담한 목소리로 '제대로 놈의 가면을 찢어발겨 우리가 그놈을 키워주는 일은 없도록 하는 것이 기자이지 않냐?'라고 반문하는 교수에게, 나는 딱히 뭐라 이야기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도착해 비행기에서 내리며 핸드폰을 다시 켜면서 나는 슬쩍 교수의 연락처 저장을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