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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16. 2022

삶은 계란 - 1

부활절 즈음을 추억하는 단편

                           삶은 계란


                          - 1 -


내면 가장 깊숙한 바닥에서부터 네가 완전히 몸을 떨며 모든 것을 느낄 때

기쁨과 괴로움이 늘 너에게 주었던 그 모든 것을, 폭풍 속에서 너의 마음은 부풀어 오르고 눈물 속에서 해방된 것처럼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마음의 불꽃이 증대하고 모든 것이 너에게 울리고 떠다니고 떨고 그리고 그 모든 감각이 너에게서 사라지고 너는 너에게서 떠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가라앉는다.

모든 것은 너의 주위에서 가라앉고 그 어둠 속으로, 그리고 너는 내적인 자신의 감정 속에서 한 세상을 포옹한다.

그러면 너 인간은 죽는다.

                          괴테의 <영원한 유태인> 중에서


사랑과 죽음은 개별화의 고통에서 신적인 본질을 해방시킨다. 사랑과 죽음은 유한한 한계를 벗어나게 하고 근본적으로 신적인 것과의 재통합으로 인도한다. 사랑은 그래서 죽음의 전 단계이고 죽음은 죽음 편에서 보면 개별적인 것과 세계영혼의 재융합을 의미한다. 인간이 그리워하고 꿈꾸고 바라고 두려워했던 것이 모두 성취되는 순간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뜻하는 그 신비를 프로메테우스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말로 위의 쓴 것과 같이 판도라에게 설명한다.



여기까지 써내려 가다가 다시 생각이 끊긴다.


괴테가 과연 자살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던 게 맞나?


만년필의 잉크가 조금씩 원고지에 물방울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보다가 펜을 놓는다. 그리곤 가만히 의자를 젖히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훨씬 화사하고 가벼운 톤으로 바뀌어 있다.


봄이구나.


아침에 입고 나온 벨벳 콤비가 무색해 보인다. 봄이 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람처럼 창문을 열어 그 봄을 맡아보려 한다. 창문을 열자 싱그럽고 알싸한 봄내음은 아니지만 차갑고 쌀쌀맞은 겨울 내음은 없어졌음을 느낄 수 있다.


봄이구나, 정말.


쓰던 원고지 위로 펼쳐놓은 괴테 전집 두어 권이 살짝 부는 봄바람에 페이지를 저 편할 데로 넘겨버린다.


                          - 2 -


그녀가 죽었다.


입춘이 지났긴 했지만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춥고 쌀쌀한 바람이 불던 2월의 어느 날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연히 TV를 보고 있는데 그녀의 죽음이 속보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화면 속의 자료화면을 보면서 그녀가 내가 알고 있던 그 사람인가를 확인했다. 그녀는 내가 보았던 영화 속의 그녀가 맞았다.


그녀의 자살소식은 채 하룻밤을 넘기기 전에 이미 온 매스컴의 주목을 끌었다. 아름답고 자신만만하고 인기가 있던 그녀의 죽음은 그것이 갑작스러운 사고가 아닌 자살이었기에 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것은 자연스레 여러 ‘-카더라’ 통신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다음날 병원에 출근해서 병동으로 걸어가면서도 내 귀에는 심심찮게 그녀의 이름이 들먹거려졌다. 그녀가 연예인이었기 때문에도 그러했겠지만 그녀가 왜 자살했을까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발 빠른 네티즌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젊고 미래가 총망하며 아름답고 재기 발랄했던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직업의 특성상 나는 그녀의 죽음에 더 민감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원장님! 예약하신 송 영진님 오셨는데요.”


간호사가 인터폰으로 가볍게 환자가 왔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시계를 잠시 바라본다. 원래 약속했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그를 기다리라고 할 것인지 잠시 생각한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시작해도 나쁠 건 없는데.


보이거나 들린 것은 아니지만 진료실 밖에서 있었을 상황이 그려진다. 언제나 환자들에게 엄격한 김 간호사는 분명히 그에게 아직 진료시간 전이니 기다려야 한다고 무섭게 말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나에게 노티를 했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상당히 다급해져 있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그 역시 듣지 않았을 리 없다. 그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우울증의 정도가 심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보다 굉장히 예민한 성격이었고 무엇보다 최근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와 헤어진 것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였다.


“상담실로 들어오시라고 그래.”


바로 가운을 입고 상담실에 들어가 불을 켜고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그가 일주일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로 들어왔다.


“신문에 났더군요. 그녀의 소식이…”


그는 일상적인 대화방식과는 사뭇 다른 자신만의 어투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뜬금없는 얘기에 그제서야 난 그가 하는 일이 프리랜서 사진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자살했던 그녀와 무슨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네? 아, 예. 저도 봤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의 심각한 표정을 읽으며 나는 지난 몇 주간 있었던 그와의 상담을 떠올렸다. 그는 많은 것을 얘기하려고 들지 않는 케이스에 속했다. 물론 그것이 정신과 상담의의 자질 문제라고 한다면 뭐라 그 비난을 피할 수 없겠지만 아직까지 본격적인 상담에 들어가기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고 나는 여겼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표정이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멍해있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정신적 공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 입술을 떼려는데 그가 던진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했을 굵은 사인펜의 동그라미는 작은 박스기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박스 기사에 보이는 굵은 글씨로, ‘첼리스트 조연미 내달 3일...’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그렇게 멍해졌던 이유가 어제 있던 여배우의 자살 소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이건……”


그가 굳이 설명하지 않았더라도 그와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의 결혼 소식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내 시선을 따라와 신문의 기사를 다시 보면서 작지만 입술에 파문을 일으켰고 그 파문은 점점 커져 그의 숨소리를 흐느낌으로 바꿔놓고 있었다.


나의 감성은 그의 흐느낌보다 강남의 유명한 교회에서 만난 독실한 크리스천 남편과 만난 독실한 크리스천이라는 대목에 더 심한 아나필락시스 쇼크 같은 것이 영혼의 굳어있던 끝자락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3 -


원고의 청탁을 받게 되었던 것은 그가 상담을 끝내고 일주일 치 약을 받아간 이튿날의 일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터라 가끔씩 원고의 청탁을 받고 가벼운 정신과 상담이랄지 잡글은 써온 일이 있었지만 이번 시사 월간잡지의 원고 청탁은 좀 이례적인 것이어서 머뭇거리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야야! 오 박! 너 그러지 말고 이번에 정신과 닥터 글쟁이 친구 둔 덕 좀 보자.”


원고 청탁이라고는 하지만 거의 강제로 떠맡기는 식이었다. 그 잡지사 데스크를 맡고 있는 사람이 중고등학교 내내 윗집 아랫집 허물없이 지내던 상현이었다는 것도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녀석은 먼저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 대신에 우리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고서 오히려 친아들인 나보다도 더 끔찍하게 잘 챙겨서 내게 오히려 부담스러운 녀석이었다.


“상현아! 좀 봐주라. 나 말고도 많이들 쓰고 꽤 많이 떠들고 하던데 나까지 거기 보태서 그 밥에 그 나물 될 일이 뭐 있겠냐? 안 그러냐?”


“아, 그러니까 그런 식상한 정신과 닥터들의 천편일률적인 글 같은 거 원하는 게 아니라잖냐? 너 글 잘 쓰는 거야 내가 보증하는 거고 이번 기회에 아예 자살문제와 문학적인 측면을 결부시켜서 한번 가봤으면 해. 아무리 생각해도 너 만한 적임자가 없으니 어쩌냐? 하여간 이번 주말까지는 원고 매수 칼같이 지켜서 보내줘야 한다. 원고료는 물론이고 내가 근사한 곳에서 한번 모실 테니까… 그럼 부탁한다.”


“여보세요! 야! 상현아!”


그렇게 맡게 된 자살을 테마로 한 내 글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의식과 잘 나가지 않는 사유의 진도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문학과 결부된다면 누구의 어떤 작품을 자살과 연관 지을 것인가.


그때 그가 상담 중에 흥분해서 언성을 높이며 내지르듯 항변했던 말이 귓가에 남아 울렸다.


“제가 지금 와서 그녀를 잊지 못한다고, 그녀를 사랑하는 데 종교가 무슨 이유가 되느냐고 한다면 다른 사람이 저에게 뭐라고 할까요? 헛되이 애쓰며 다 소진하는 힘의 깊은 내면에서 ‘주여,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하고 이를 갈며 부르짖는 것은 자기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궁지에 내몰려, 자기 자신을 상실하면서 끝없이 전락해 가는 피조물인 인간의 목소리가 아닌가요? 그건 주님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그의 울부짖음 같은 항변과 함께 오버랩되어 떠오른 것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다. 괴테는 베르테르와 파우스트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문학적 편력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집을 떠나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고서 인생공부를 연마하는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마침내 종착역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수업과 편력의 노정에서 한 번쯤 그것에 걸려 좌초하게 되는 베르테르와 파우스트의 그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서고에 꽂혀 있던 이전의 괴테 전집이 생각났다. 나 역시 젊고 사랑에 아파했던 시절이 있었고 존재의 가치 때문에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떠올랐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바로 자살이라고 시지프스의 신화를 말하며 알베르 까뮈를 읽던 그 시절의 내가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는 어느덧 잊고 지냈던 그즈음의 내가 기차에 오르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 4 -


그렇다, 나는 아마도 한낱 나그네에 불과하다.
이 지상의 일개 순례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라 해도 그 이상의 것이겠는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에서


왜 하필이면 괴테였고, 왜 하필이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손에 들었던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느새 난 책의 중간까지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시선이 멈춰서 걸려있던 부분은, 주인공 베르테르가 사회에 유용한 시민적 직업의 시험대라 할 공사 직원으로서의 실험이 실패하자 호머의 <오디세이>에서 위안을 찾고자 하는 대목이었다. 이제 과거 의식에만 빠져 있는 율리시즈가 아니라 불행하고 병든 오디세이로서 방랑을 계속하는 것이다. 순례자가 갖는 모든 경건한 마음을 가지고 그는 고향으로의 순례 행각을 마친다.


그녀와의 힘겨운 관계의 실패를 우려한 내가 훌쩍 기차를 올라타 괴테의 책을 펼치고 있는 것과 너무도 흡사한 상황이었다. 아무도 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누군가 내 상황과 내가 도피하려는 사내답지 못한 모습을 꿰뚫고 노려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위를 살폈다.


“자, 오징어 있습니다. 맥주 있습니다.”


흔들거리는 좁은 거리를 간식거리가 잔뜩 실린 카트를 밀면서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기요…”


남자는 카트를 내 옆에 세웠다. 막상 뭔가 사 먹을 생각이긴 했는데 갑작스레 이것저것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보니 뭘 달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뭘 드릴까요?”


“맥주 하고 오징어 하고… 주세요.”


맥주캔을 받아 들곤 지갑을 꺼내 드는데 끼니를 계속 걸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계란이 눈에 들어왔다.


“계란도 2개 주세요.”


손에 계란과 맥주, 그리고 오징어를 받아 들고는 덮은 책 위로 가만히 올려두고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두 계란!”


건너편 자리에 엄마와 함께 앉아 있던 꼬마 여자애가 말했다.


“계란은 무슨…! 먹지도 않을 거면서… 됐어!”


엄마는 여자아이를 다그치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난 계란 한 개를 집어 아이에게 줄 양으로 내밀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각선 좌석에 떨어져 앉아 있던 여자가 불쑥 셀로판으로 장식된 계란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이거 먹을래?”


여자의 가늘고 흰 손가락에 들려 있는 계란은 예쁘게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것을 다시 속이 환히 비치는 셀로판지로 포장해서 마치 캔디처럼 리본을 묶어 무슨 장난감을 보는 것 같았다.


“와!”


여자아이가 입이 벌어지며 그녀가 내미는 계란을 받았다.


“선경아! 고맙습니다, 해야지?”


아이의 엄마가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했던지 아이에게 감사인사를 종용했다.


“선경이구나, 이름이. 선경이는 그 계란이 무슨 계란인지 아니?”


아이에게 계란을 건넨 여자는 대학생인 듯해 보였다. 옆의 남자 친구와 함께 여행을 가는지 둘의 사이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다른 계란들을 보이며 아이에게 말을 건넸다.


“아니요.”


“응. 모르는구나. 선경이는 교회에 다니니?”


“아니요.”


교회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계란을 까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얼른 맥주캔을 따서 입가를 적셨다. 그녀의 설명은 내 의사와는 무관하게 너무도 또렷하게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이건 ‘부활절 계란’이라고 하는 거야. 부활절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축제날이야.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계란에 서로 소망 같은 것을 담은 정성스러운 그림을 그려서 주고받는 걸 하는 거야. 그래서 언니가 선경이한테 그 계란을 준거야.”


그녀의 설명을 꼬마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부활절 계란은 억지로 삶은 계란을 입에 구겨 넣고 맥주를 마시는 내게는 서울에 놔두고 온 그녀에 대한 기억들이 스멀거리며 떠오르는 계기를 제공하기에 충분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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