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부친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이었다.《태사공서》의 맨 마지막 부분인《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그 자신이 쓴 자서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이 되던 해, 낭중(郎中:황제의 시종)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데 상당한 노력과 시간을 기울였다고 한다.
BC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그 후 2년이 지나 무제의 태사령이 되었고 태산 봉선(封禪: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 의식을 수행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나머지 그의 아버지는 급속도로 쇠약해져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시작한 역사서의 완성을 부탁하며 아들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그렇게 태사령으로 무제를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허베이 ·요서 지방을 여행하며 그는 크게 견문을 넓혔고,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어, 황실과 조정의 석실 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실패를 극복한 인물에 대해 50여 명이 넘는 이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면서 정작 그 가장 대표되는 인물의 소개가 늦었다.
중국 전한의 역사가이자, 《사기》의 저자이다.동양에서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위인이자, 전 세기를 통틀어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위대한 역사가라고 일컬어지는 사마천(司馬遷)의 이야기이다.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도중, 사마천은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하는 글을 쓰게 된다.
이릉(李陵)은, 삼대가 무제와 악연이었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인품이 훌륭하기로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또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한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기록되었지만 이릉이 그러한 정황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 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한다.
그러자, 얼마 전까지 이릉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답답했던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밝히며 이릉을 변호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 어린 변호는 무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의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 광리를지목했다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었다. 대장군 이 광리는 다른 이도 아닌 그의 애첩 이 부인의 오빠이자, 무제의 처남이었다.
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바로 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린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서로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사이였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칭찬을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릉을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의 하문이 있어서 이릉을 변호했던 것뿐이었다.
상황은 더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고 흉노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사마천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 돈 50만 전을 내고 신분이 박탈되어 서민으로 풀려나는 것
둘째, 사형
셋째, 궁형(생식기를 잘라내 버리는 거세 형벌)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거금이었던지라, 사마천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그는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가 아닌,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고자가 되는 결정을 내린다.
《태사 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그는 "이것이 나의 죄인가! 이것이 나의 죄인가! 내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게 되어버렸구나!"(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毁不用矣!)라며 크게 절망했다고 한다. 이 궁형으로 그는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실제로 궁형을 당한 다수의 사람들이 감염증으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면하게 된 그는 여름에는 지독한 냄새 때문에 가족들조차도 멀리했다고 한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익주 자사 출신의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냈던 편지, <보임안서(蕔任安書)>에서 한무제에게 똑같이 누명을 쓰고 사형을 기다리던 친구를 위로하며, 자신이 겪었던 동일한 상황에서 겪었던 상황을 기술하며,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렸다(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하며 죽고만 싶었다고 쓴 기록이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 광리 또한 나중에 무제 말년의 후사 문제에 휘말리게 되자 흉노와 싸우라고 준 군사들을 이끌고는 망명해버리는 사건이 터진다.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 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버렸다.
이후, 한무제는 사마천을 보면서 미안함이 들었던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더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버리는 형벌을 명하고 나서는,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그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궁형 이후 수염이 말끔해진 사마천의 초상화
죽음 대신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제외하면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주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 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태사공서》를 완성한다.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 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빠지지 않고 포함되었고, 심지어 여타의 사서들을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중국 정사의 24사 중,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사마천은《사기》를 완성한 이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고, 후세에 사천(史遷), 태사공(太史公), ‘역사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다.
《사기》를 저술할 때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하고, 고금의 변화를 통달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룬다”라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사마천은 《사기》곳곳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고, “믿음을 보여도 의심하고 충성을 다해도 비방한다”라며 자신의 억울한 심경을 솔직히 표출하고 있다. 부당한 억압을 딛고 통쾌하게 복수한 인물들을 대거 편입시켰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대세를 바꾼 사람이면 누구든 기록하여 그 역할과 작용을 각인시켰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사기》는 보통 사람을 중시했고, 역사의 주역이 따로 있지 않다는 역사 인식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겼다.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아니니, 다시 그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 역사의 제대로 된 평가를 통해 언젠가는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사기》의 완성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어떤 좌절도 궁형을 당했던 사마천의 그것과 비유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가 궁형을 당했을 때의 나이 48세.
어쩔 수 없는 궁형도 아닌, 사형과 궁형 간의 선택지에서 그가 선택한 것이었기에 더 아프고 아리다.
그에게 있어《사기》는 그가 유일하게 잡고 있는 자신의 남은 생명의 끈이었을 것이 명징하다.
어떤 일을 해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말을 곧잘 듣곤 한다.
사마천은 자신의 죽음과 바꿔 치욕스러운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의 이유를 이 저술 작업 하나에 걸었다.
이 저술 작업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치욕스러운 삶을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똑같은 선택을 강요받았던 친구 임안(任安)은 사형을 택했다.
절개와 지조와 자신의 의지가 죽음보다 강하게 인식되던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했고, 그 대의명분을 살리고 자신의 남은 생을 불사르며 이를 악물고 피를 토하며 붓이 부서져라 움켜쥐고 한 글자 한 글자 그 안의 인물이 되어 외치고 또 외쳤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자살의 형태는 단순한 자살과는 확연히 비유된다.
얼마나 억울했고 얼마나 그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으면 그것을 알리기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릴 결정을 내렸겠는가?
그 역시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가 삶을 연명하고 했던 저술 작업이 더욱더 고통스럽고 힘겹고 가슴 아팠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