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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ug 23. 2021

최초로 전화기를 발명하고서도 그 타이틀을 빼앗기다

그래도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결코!

1835년 오하이오주 바니스 빌에서 태어났다. 오벌린 칼리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졸업을 하지는 못했다. 그곳에서 전기 장치를 실험하면서 전기와 과학을 가르쳤고 교사일을 했고 과학 부서를 위한 실험실 장비를 제작했습니다. 자신의 일을 해보겠다고 1869년 E.M. 바턴과 함께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 상회는 뒤에 웨스턴 일렉트릭 사로 발전하였다.


1876년 A.G. 벨(1847~1922)과 같은 날에 전화기의 발명 특허를 신청하는 바람에, 그 유명한 최초의 전화 특허권을 둘러싸고 소송전을 계속하였다. 결론은 12년이나 지나 대심원에서 패소하였다.

엘리샤 그레이 (Elisha Gray)의 초상화

전화기를 발명한 인물로 위인전에 오른 벨의 역사의 그림자에 감춰져 있던 엘리샤 그레이 (Elisha Gray)의 이야기이다.


위인전에서 벨이 첫 전화 특허를 냈다고 기록하고 있는 1876년 2월 14일, 이 날은 월요일이었다.

사실 엘리샤 그레이는 전화 특허 외에도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에 대한 특허는 그 많은 것들 중에서 하나였다. 주말이 되기 전에 접수를 할 생각이었던 그레이는 발명과 특허의 특성상 아무에게도 그 내용에 대해서 알리지 않고 극비를 유지하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동업자와 변호사를 통해 특허를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벨의 특허 법정대리인을 맡고 있던 변호사는 동일한 전화기에 대한 특허가 그것도 먼저 제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미리 손을 쓰게 된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미국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특허를 담당하게 된 심의관이 월요일 출근해서는 벨과 그레이의 특허가 상충된다는 판단을 하고, 이를 둘에게 통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운명의 장난 같은 해프닝에 대해 두 사람의 반응은 완전히 갈린다.

이 통보를 받은 그레이는 “장난감을 놓고 특허를 다투는 것은 어리석다.”면서 별 미련 없이 자신의 특허 신청을 취소해버리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취소하지 않으면 법정까지 가서 다퉈야 함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다툴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국 그레이는 이 바보 같은 결정에 대해 평생을 후회하게 된다.


하지만 벨은 변호사에게 자신의 것보다 성능도 더 나은 전화기 특허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보스턴에 있다가 바로 달려와 3월 9일부터 보완연구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문서상으로는 신청 취하를 하지 않은 벨의 특허 하나만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벨 측에서는 간절함이 더했다. 벨 측에서는 제출한 전화기가 제대로 작동이 잘 않는다는 프로토 타입이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더 성능이 좋았던 그레이 측의 내용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출했던 이전 모델에서 뭔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는 들리는데, 또렷한 목소리가 전달되는 상태가 아니었던 벨은 자신이 무엇이 부족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보완하여 좀 더 완벽한 성능에 가까운 전화 음질을 만들어내는데 주력했고, 그 사이 그의 변호사는 법적으로 소송까지 갔을 때를 대비하면서 여러 가지 서류를 미리 날짜를 이전으로 맞춰 사인하는 등의 발 빠른 대처를 하게 된다.

전화기 특허 싸움의 승자 그레이엄 벨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레이는 전신회사인 웨스턴 일렉트릭사를 세운 엔지니어 출신이었다. 당시 전신 엔지니어들이 추구하고 발명하고자 했던 기술은 단 하나였다. 하나의 전신 전선을 이용해서 10, 20개의 다른 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는 시스템인 이른바 ‘다중 전신’이라는 것이었다. 똑같은 전화기의 특허를 신청하였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전화기였던 벨과 달리, 그레이는 이 다중 전신을 개발하다가 그것을 테스트하고 활용할 수 있는 매체 역할로 전화를 만들게 된 것이었다. 우연히 전화를 발명했지만, 전화기의 발명이 그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아쉽지만 그는 당시 그 중요성과 파급성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반면 벨은 원래 엔지니어 출신이 아니었고 농아학교 교사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그 학교의 학생 메이블 허버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유명한 변리사이자 사업가인 메이블의 아버지 가드너 허버드가 벨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하고 싶다면, 제대로 된 다중 전신을 발명하라고 조건을 내건 것이다.


농아학교 선생님이었던 벨은 사람이 말을 하고 듣는데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라는 시작점이 있었다. 그래서 다중 전신을 발명하면서 말하고 듣는 기계, 즉, 전화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벨의 첫 특허는 전화에 대한 특허가 아니라 전신에 대한 특허였다. 벨의 특허 마지막에 전화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가드너 허버드는 엘리샤 그레이와 마찬가지로 전화기는 테스트일 뿐이니 이 부분을 빼라고 한다. 하지만 벨이 끝까지 고집을 해서 이 전화기에 대한 내용을 빼지 않고 특허를 신청한다. 벨은 엘리샤 그레이와 달리, 다중 전신보다 전화기가 세상을 바꾸는 기술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고집과 미래를 읽는 선견의 승리였다.  


그런 이유로, 벨에게는 다중 전신의 전선보다는 당연히 소리가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전화기에 집중하게 된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당시 미국에서 유명세를 떨치던 변리사가 장인이 될 사람이었으니 법적으로 전화기를 철저하게 자신들의 것으로 하겠다는 사업적인 판단을 한 변리사 측의 승리는 뻔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의 기술이 더 뛰어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레이가 12년이나 법적으로 싸웠지만, 처음 특허 신청을 취소했던 것에서부터 그 싸움의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굳이 특허 전쟁의 승자로 위인전에 남게 된 벨이 남겼다는 명언을 위에 게시한 것은 이유가 있다.

위 명언, '한쪽 문이 잠겼다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는, 하나에 실패했다고 해서 실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고 계속 정진하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명언은 엘리샤 그레이의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신의 발명과정 중에서 나왔던 전화기가 시대를 선도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엘리샤 그레이의 입장에서 벨이 승승장구하고 전화기의 발명이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으면서 속이 얼마나 뒤집혔겠는가?

그것도 하루 이틀 차이도 아니고, 같은 날 서류가 도착했다면서 자신이 연구했던 액상 전화기 기술이 그대로 적용된 전화기를 보면서 얼마나 속에서 부아가 났겠는가 말이다.

대부분이 발명가들이라면 화병으로 쓰러져 그냥 무너져버리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뒤늦게 소송전에 뛰어들어 12년이라는 시간과 엄청난 자금을 투여하는 후회와 미련을 보였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만다.


우리는 늘 일인자만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 준비했다. 그렇게 위인전 일인자의 그림자에 감춰진 이인자들이 모두 그냥 역사의 저편으로 사그라져 들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특허 전쟁이 발발한 지 6년이 지나서 그레이도 자신의 사랑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965년 전신 선의 다양한 단열재에 자동으로 적응하는 자체 조절 전신 릴레이를 발명했다. 그리고 1867년 도합 7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받는 기염을 토한다.

1869년, 파트너와 함께 회사를 설립하고, 본인이 본래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전신 전선 장비를 선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인 초심을 잃지 않았다. 회사를 창립하고 운영하면서도 수석 엔지니어의 위치를 놓치지 않고 고수하였고 나중엔 독립적인 발명과 연구에 몰입하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대로 오롯이 자신의 연구에만 몰입하여 팩시밀리의 원형에 해당하는 서화 전신기(書畵電信機:Tela-utograph)의 특허를 1888년과 1891년에 취득하여 부와 명예를 차지하게 된다.


1874년 독립적인 연구 개발을 위해 은퇴한 그레이는, 1874년 12월 29일 교회에서 그레이는 음악적 톤을 전달하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첫 번째 공개 시연을 하게 된다. 이날 공개된 키보드는, 진동 전자기 회로를 사용하는 최초의 전자악기였고, 현대 신시사이저의 원형이 된, '뮤지컬 텔레그래프'였다.

1900년 그레이는 수중 신호 장치로 작업하여 몇 년 후 수중 신호 장치의 발명가로 인정받았다.

내가 단언컨대, 엘리샤 그레이는 그가 그레이엄 벨에게 뒤처진 이인자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아이디어를 직접 연구와 발명을 하는 엔지니어로서의 자부심이 있었고, 다중 전신 분야에서 최고의 연구자이자 엔지니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그의 자부심을 고스란히 증명해 보였다.


당신이 간발의 차이로 당신의 발명품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고 위인전에 오를 기회를 잃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은 걸음마와 동시에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그 사회생활에서 경쟁에 내밀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옆의 누군가를 이기고 눌러야

자신이 올라가는 것이라고 잘못 배웠을지도 모르겠기에 이 말을 남긴다.


당신이 일인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꼭 누군가를 누르지 않더라도

당신이 당신이 믿고 옳다고 배운 그 길을 가고 있다면 조금 늦게 도착한다고 해서

당신을 감히, 패배자라고 부를 이는 없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살아서 당신이 행복하다면 굳이 말리지 않으마.

하지만 내가 살아온 짧지 않은 인생과 그간 읽은 문헌 어디에서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당신이,

당신이 결정하고 당신이 만족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다른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눈치 볼 필요 없다.

당신이 지켜 나가겠다고 결심한 그 신념을 제외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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