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2년 마쓰다이라(松平)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문의 기반이던 지역은 미카와 국 오카자키(지금의 아이치현 동부의 오카자키시. 나고야시보다 남동쪽 아래에 위치해 있다.)였다. 아명은 타케치요(竹千代, 마츠다이라 가문의 후계자에게 대대로 주는 아명)라 불렀다.
지방 호족이었던 마쓰다이라 가문은 그의 조부 기요야스 시기에 부흥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기요야스가 부하의 배신으로 사망한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은 큰 위기에 빠졌다.
갑작스러운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당시 10살이던 그의 아버지가 가문의 뒤를 이었으나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이란 양강 세력 사이에 끼여 정치적으로 대단히 불안정한 처지였다.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그의 아버지는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도움으로 본거지인 오카자키 성으로 간신히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그는 불과 2세 때, 어머니와 강제로 헤어지는 불행을 겪는다. 외가가 오다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 이마가와 가문에 눈치를 보던 아버지가, 충성의 표시로 어머니와 이혼하고 어머니를 버린 것이다. 그렇게 외가로 돌아간 어머니는 2년 후 다른 성의 성주와 재혼함으로써 마츠다이라 가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해버린다. 즉, 그에게 2살 이후부터 친모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후 오다 가문의 노부히데(織田信秀 : 노부나가의 아버지)에게 공격을 받아 수세에 빠진 그의 아버지는 이마가와 가문에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그 대신 6살이 된 장남이던 그를 인질로 보냈다. 그러나 스루가로 가던 도중에 다하라 성의 성주의 모략으로 그는 납치되었고 당초 목적지와 달리 적대세력인 오다 가문으로 보내진다.
이마가와 가문에서 인질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의 눈치를 보며 개명한다. 이후 수차례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그때 상황마다 상당히 많은 개명을 한다. 이름을 여러 번 바꿨어도 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야스(康)는 끝내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할아버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거나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거나 등의 이유가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유약하던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가 롤모델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즈오카시 슨푸유메히로바(すんぷ夢ひろ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박물관에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상.
일본 전국시대 최종국의 챔피언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이후 250년이나 지속된 에도 막부(江戸幕府)의 시대를 연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 미카와 지역의 영주였으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세력 안에 들어가는 등의 일을 거치며 착실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오다 사후 떠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전국시대를 종식시켰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숙였지만,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등을 일으킬 때 조용히 몸을 사리며 힘을 기르다가 그의 사후에 히데요시의 세력들을 상대로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이긴 뒤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
지금의 도쿄인 에도를 개척하여 에도 막부를 만들어 에도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리고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1549년 3월, 24살에 불과했던 아버지가 부하의 배신으로 살해된 후, 마쓰다이라 가문은 더욱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런데 마침 그해 3월부터 이마가와 가문의 공격을 받던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 노부히로(信広)가 지키던 안쇼 성이 11월에 함락되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노부히로와 이에야스를 서로 교환하는 인질 협상이 성립되어 간신히 그는 오카자키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2년간의 나고야성 인질생활에서 돌아온 그는, 그나마 집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관리하에 그들의 본거지인 슨푸로 끌려가게 된다. 그렇게 그의 인질생활은 8살이었던 당시부터 19살 때까지 이어진다.
1555년, 성인식을 치른 후 사실상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 되어, 1557년 이마가와 가문의 중신이자 그 일족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 오카자키 군(軍)을 거느리고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공격을 위해 대군을 일으키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오와리 국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요시모토를 기습하여 목을 쳤고, 이마가와 군에 종군하여 쏠쏠한 군공을 세우던 이에야스도 급히 퇴각하던 중, 오카자키에 입성해 혼란을 틈타 사실상 이마가와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미카와를 흡수하고, 156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이른바 기요스 동맹)을 맺음으로 이마가와의 종속에서 완전히 독립하였다.
결국, 노부나가는 미노 국, 이세 국 등을 정복하며 서쪽으로 확장해갔고, 이에야스 역시 영지 내의 잇코 종도의 반란을 진압해가며 착실히 세력을 키웠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모델
1568년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마가와 가문을 공격하여 도토미 국은 이에야스가, 스루가 국은 자신이 서로 분할하여 차지하자는 제안을 한다. 이에야스는 신겐의 제안에 호응하여 도토미로 출병했고, 같은 해 12월 신겐도 스루가를 공략했다.
이듬해 5월, 이에야스는 도토미를 거의 평정한 후, 1570년에 도토미의 히쿠마에 성을 쌓아 ‘하마마쓰’라고 이름 짓고, 미카와 오카자키에서 이곳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571년부터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가문을 같이 공격했던 다케다 가문과 싸우기 시작했다. 당초 다케다 가문은 오다 노부나가에 우호적이었으나,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노부나가를 반대하는 세력의 규합을 촉구하자 신겐은 이에 호응했다. 신겐은 자신의 동남쪽에 위치한 호조 가문과 동맹을 맺고 창끝을 서쪽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아키의 촉구는 신겐에게 교토로 진격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그런데 신겐이 교토로 가려면 우선 노부나가의 동맹군이자 자신의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이에야스를 제거해야 했다. 이에 신겐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도토미와 미카와를 일시에 침공하여 이에야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오다 가문이 아자이와의 일진 일퇴의 공방을 벌이던 1572년, 노부나가 포위망의 일각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오다 공격을 결심하고 동해도(도카이도)로 진격하였다.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
이에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맞서지만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겐에 맞서는 길을 택했고, 다케다보다 수가 적으면서(1만 1천 명 대 2만 7천 명)도 다수 대 소수에 유리한 학익진으로 도전했는데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종심 깊은 어린진으로 대응한 다케다 군에 크게 패배하였다. (전사자 2천 명 대 2백 명) 오다측의 대장, 히라테 히로히데(平手汎秀)는 전사하였고, 이에야스 측은 도리이 시로자에몬, 나루세 마사요시 등의 유력 가신을 잃고 패주하였다. 그것이 이에야스가 겪은 가장 처참했던 패배로 기록되는 그 유명한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였다.
이 전투에서 이에야스는 신겐에게 패해 도망치다가 말안장에 똥을 쌌다고 할 정도로 죽기 직전까지 몰려 도망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돌아와 자존심 때문에 똥을 식량으로 가져간 볶은 된장이라고 시종들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리고는 그는 바로 화공을 불러 그러 자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라며 그리게 했다고 한다.
현재 아이치현 나고야의 도쿠가와 미술관에 소장
명예를 중시했던 일본 무사도의 개념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파격적인 행동이었다. 이 그림의 정식 제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미카타가하라 전역 화상(徳川家康三方ヶ原戦役画像)>이지만, 흔히 일본인들은 ‘이에야스의 우거지상(しかみ像)’이라고 부를 정도로 유명하다.
한편 그렇게 숨죽이고 지내던 시기, 노부나가는 이에야스의 정실부인과 아들 노부야스가 다케다 가문과 내통한 혐의가 있다고 이에야스에게 통보하고 이들을 자결시키도록 지시했다.
당시 노부야스의 처는 오다 노부나가의 장녀 도쿠 히메(徳姫)였는데 시어머니와 사이가 나빴고, 이로 인해 부부 사이도 좋지 않았다. 도쿠 히메는 시어머니가 다케다 가쓰요리와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을 노부나가에게 전했다고 한다. 도쿠가와 가문의 일부 중신들은 굴욕적이라며 반발했지만, 이에야스는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여 아내와 아들을 죽여 노부나가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
1582년 6월 초, 오다 노부나가는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의 모반으로 인해 혼노지에서 사망한다. 노부나가 사망 당시 이에야스도 교토에 있었는데, 아케치의 모반을 안 직후 이에야스는 사카이에서 이가의 경호를 받으면서 험준한 산을 넘는 도피행 끝에 미카와로 무사히 도망하였고, 미카와 귀환 직후에 미츠히데 토벌을 위한 군세를 편성하여 이미 오와리에 이르러 있었다. 이후 사실상의 공백지가 된 구 다케다의 영지를 흡수하였고, 간토의 패자인 호조 가와 사돈의 연을 맺으면서 도카이 지방의 패자로 등극하였다.
한편, ‘혼노지의 변’ 보름 뒤에 노부나가의 부하인 하시바 히데요시(후일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케치를 격파하였고, 그 달 말에는 오다 가의 발상지라 할 수 있는 키요스 성에서 가신들 간에 다음 당주를 정하는 회의(키요스 회의)가 열렸다.
이후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게 되면서 결국 1586년 이에야스도 관백에 오른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고 히데요시의 거성 오사카 성에 입조하였다. 이때 이에야스는 차남인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의 양자(사실상의 인질)로 보내었고, 히데요시는 이부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어 사실상의 종속관계를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급속히 불어난 휘하 영주들에게 나눠줄 땅을 확보하고 비대화된 군사력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침략을 일으키려 했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도요토미 가(家)의 중진(重鎭)들이 반발했지만, 히데요시는 결국 출병을 강행하고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최대의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임진왜란에 참여하도록 압박을 받았지만, 도쿠가와는 관동 일대의 반란 진압 및 관동 경영을 핑계로 관동 다이묘들을 비롯한 자기 세력의 참전 규모를 최소화하고 일부만 전진기지인 지금의 사가현 가라쓰시 히젠 나고야성에 주둔시키는 선에서 움직이지 않으려 한다. 히데요시로서는 이에야스의 지원이 절실했으나, 이에야스의 세력이 상당해서 무시할 수 없는 처지라 결국 이에야스의 지원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으로 인해 몰락하면서 이에야스의 판세를 읽는 눈은 그에게도 천하를 잡을 기회를 제공하는 듯 보였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이에야스는 드디어 야심을 드러내며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등 도요토미 가 내부의 오와리 국 출신의 다이묘들을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600년 6월, 아이즈의 우에스기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고발과 우에스기 가문의 도발적인 대답을 계기로 이에야스는 이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오사카에서 출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 역사에서 가장 큰 전투 중 하나이자 '천하를 둔 전투'라 일컬어지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의 서막이었다. 결국 이에야스는 이후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모략으로 승기를 갖추어놓고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츠나리와 결전을 벌인 끝에 군사적 식견의 우위를 점하고 승리, 마침내 천하를 잡게 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의 직할 영지를 오사카 성과 그 일대의 60여만 석(본래는 220여만 석)으로 축소시키고, 나머지 자신을 적대한 가문들도 모두 추방 또는 감봉, 전봉하였다. 그리고 이에야스를 예전부터 따르던 중신들 및 일족들을 전국의 요지에 배치하였다.
1603년에는 세이이다이 쇼군(征夷大将軍)에 취임하고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열어 사실상 전국을 통일하였다. 1605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오고쇼(大御所)'라 칭하며 표면상으로는 은퇴하였다. 그리고 슨푸(지금의 시즈오카)에 거처하고 하야시 라잔(林 羅山), 차야 시로지로, 미우라 안진 등 주요 인재를 등용하였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임진왜란은 일본의 뜻이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시 혼자만의 뜻임을 강조하였으며, 임진왜란에 참전한 다른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출진한 것이라 해명하며 사과하며, 소 요시토시를 시켜 임란시 납치된 조선인과 약탈품들을 가능한 한 송환하도록 했다. 또한 도요토미계의 잔당들과 후예들을 '수적'이라 칭하면서 그들을 모두 소탕해 씨를 말렸다고 조선 조정에 알리는 외교적 센스를 발휘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단번에 정상화시켜 버리는 수완을 발휘한다.
1615년 5월 이에야스는 결국 히데요리를 죽여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센고쿠 시대 이래 각 지역 영주들 간에 혼란스럽게 이어지던 전란의 물결은 이로써 잦아들게 되었다. 그해 7월에는 연호를 게이초에서 겐나로 바꾸었다. 이를 흔히 겐나언무(무기를 무기고에 넣다)라고 한다. 이 직후 이에야스는 무사를 대상으로 한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와 천황과 공가(귀족)를 대상으로 한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하여 막부의 기반을 확립했다. 모든 정리 작업을 끝낸 1616년, 그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향년 75세.
사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대기는, 그 자체가 당시 일본의 역사이기에, 그의 일대기를 이런 짧은 단편적인 글로 모두 묘사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있다.
내가 일본인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시리즈에서 일본인들을 간혹 소개하는 이유에 대해 시비를 거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싶어 사족을 좀 달고자 한다.
분명히 말해두건대, 이 시리즈는 존경할만한 위인을 소개하는 위인전이 아니다.
당신이 위인 혹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막연하게 올려다보던 그들이, 인간으로서 아니, 인간이기에 실패하고 실수하고 좌절했던 경험을 당신에게 소개하고, 그들이 그러한 실패와 좌절을 극복했기에 당신마저도 알고 있는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바로 그 부분을 소개하고자 하는 것 그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소개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은, 그야말로 고난과 위기와 실패로 점철된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태어나서 말을 익숙하게 하기도 전에 엄마와 생이별을 했어야 했고, 이후 엄마는 만날 수도 없었다. 6살부터 시작된 인질생활은 성년이 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믿었던 가신에게 배신당해 죽음을 당했고, 결혼마저 권력과 이어진 집안의 여자와 마음에 없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권력투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권력자의 딸을 며느리로 삼았더니 그 며느리가 고부갈등을 핑계로 친정아버지에게 밀고하여 시어머니와 자신의 아들이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모함하여, 자신이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아내를 죽이고, 후계자로 키우려던 아들에게 할복을 명하는 비정한 아버지가 되어야만 했다.
천하를 가르는 전투에서 젊은 혈기에 객기를 부려, 죽을 뻔하고 말안장에 똥까지 지려가며 패주하였다. 아내와 아들까지 죽인 권력자 사돈이던 오다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죽자 자신도 죽을 위기에서 산과 몇 개나 넘어 겨우 도망치듯 살아 나왔다.
전국시대를 통일시킨 히데요시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를 위해 싸워 가장 큰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그 대가로 그가 20년간 다스리던 5개의 쿠니를 빼앗는 대신, 호죠씨가 다스리던 머나먼 동쪽의 낯선 땅을 영지로 내리는 정치적 유배 조치를 당해버린다.
이 정도쯤 되면 그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웬만한 고난과 시련은 모두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느 하나만 겪어도 그 힘겨움에 죽음을 택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그 시대에, 그는 하나하나 그것을 극복해나갔다.
심지어 그가 막부의 수도로 삼았던 에도는,대부분 늪지대여서 버리는 땅이라고 했던 곳을 간척하고 길을 닦아가며 절치부심 자신의 시대가 올 때까지 힘을 기르고 또 길러가며 참아냈다.
본래의 품성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고난의 부침 속에 그는 말수가 적어져 과묵한 군주라는 호칭마저 얻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시는 사당, 닛코의 도쇼구[東照宮, 동조궁]에 있는 마구간 건물에 가면, 당신도 한번 보았을 ‘산자루[三猿]’라는 유명한 조각이 있다.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린 세 마리의 원숭이가 새겨진 것인데. 이것은 말하지도 듣지도 보지도 않으면서 견디는 인내의 처세술을 가르치는 의미가 있는 물건이다.
당신이 얼마나 큰 좌절을 겪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장담컨대,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만큼 구구절절한 고난을, 한 인간의 일생에 걸쳐 그렇게 모두 겪을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오늘은 불과 400여 년 전, 그가 당신을 위해 남긴 유훈으로 나의 쓴소리를 대신한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먼 길과 같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정녕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