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들리지 않아 죽으려 유서를 작성하다가 깨닫고서

음악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서 음악의 성인으로 거듭나다.

by 발검무적

1770년,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루트비히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독일로 이주하여 본 궁정의 악장을 지냈다. 아버지인 요한도 그 영향을 이어받아 음악의 길을 걸어서 궁정 가수가 되었지만 잦은 폭음으로 결국 목소리가 상해 버렸다. 심지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려 이후 아들이 연주회에서 벌어온 돈도 술값으로 탕진했을 정도였고, 술버릇도 고약해서 주변에서 상대조차 꺼리는 인물이었다. 반면, 건실한 음악가였던 할아버지는 손자를 귀여워해 주었지만, 손자가 4살 때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잔머리가 잘 돌았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차리고는, 레오폴트 모차르트처럼 아들을 이용해 돈과 명성을 얻을 속셈으로 어린 아들에게 가혹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피아노를 연습시킨 것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가 아들을 팔아 유명세를 타는 것을 부러워(?)했던 요한은 자기 아들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만들어 돈을 벌 계획에 들떠 있었다.


1778년 3월 아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아들의 나이가 6살이라고 주장했는데, 당시 실제 나이는 8살(정확하게는 7살 3개월)이었다. 이렇게 아들을 천재로 만들어보려고 나이를 2살이나 줄이기까지 했지만 워낙 대중들에게 천재 모차르트의 임팩트가 강했던 탓인지 신동 마케팅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도 그의 재능은 전문가들에게 인정받아, 11살 때 평생의 은인이 된 궁정음악가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를 만나 본격적으로 음악의 기초를 배웠고, 당시, 교회 오르가니스트를 맡고 있던 네페를 따라 무급 오르간 보조 주자로 일하는 것을 시작하게 된다.

13살의 베토벤 초상화(1783년)

그가 13살 경에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변주곡(WoO 63)에는 네페의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후 그는, 1784년에 본 궁정의 정식 교회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789년에는 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 주자 겸 부지휘자가 되었는데, 그는 이 교향악단에서 모차르트의 새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를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한층 더 넓히는 계기를 마련한다.

1786년에는, 친구이자 당시 의대생이었던 프란츠 베겔러의 소개로 귀족 가문인 브로우닝 집안(von Breuning)과 인연을 맺었고 이 집안 아이들의 피아노 선생이 되었다. 브로우닝 집안의 소개로 그는 수준 있는 고위층 인사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고 이들은 그에게 상당한 도움을 주었는데, 특히 그중에는 그의 평생 친구이자 후원자가 되었던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도 이때 인연을 맺게 된다.

1년 뒤, 본의 대주교였던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으로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인 빈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이때 평소 존경해마지않던 모차르트도 만났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모차르트가 베토벤을 만나 그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는 일화는 모차르트의 전기작가인 오토 얀(Otto Jhan)의 일방적인 주장만 있지, 객관적 근거가 희박하다. 특히, 당시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어서 관계자 외에는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어 무명이던 베토벤을 굳이 만나 주었을지도 의문점으로 남는다. 그렇게 여행에서 돌아와, 어머니가 41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게 된다.

1789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상생활을 포기한 아버지 대신, 집안을 부양해야만 했지만, 여행을 통해 경험했던 음악의 본고장 빈에서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심각하게 고민한다. 결국 그는 1792년 고향의 귀족들과 절친들의 도움으로 막시밀리안 선제후에게 단기간이긴 하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후원금으로 부친의 장례식을 치른 직후, 꿈에도 그리던 빈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또, 당시 저명한 음악가인 하이든에게 배울 수 있도록 주선까지 받는 행운을 얻게 된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의 클래식 작곡가. 바흐·모차르트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작곡가로 평가받는 인물. 세계 음악사에서 손꼽히는 존재로서 ‘악성(樂聖)’이라는 칭호를 불리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으 이야기이다.

음악가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청각장애를 딛고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불굴의 의지와 인간승리를 상징하는 인물로 유명하며, 그의 음악에서도 이러한 고뇌와 인생 역정의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또한 당시 독일 민족의 열등감을 해소한 거인과 같은 존재이자 빈 청중의 자랑이었다. 한편으로 특유의 까탈스럽고 불같은 성격 때문에 '괴팍한 천재'의 대명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함께 고전파 음악을 대표하는 음악가로 알려져 있으나, 단지 고전파라는 틀로 이 세 거장들을 묶어 버리기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음악이라는 분야에서 세운 봉우리가 너무나 높고 거대하다. 베토벤은 선배 작곡가들이 확립한 양식들이 좀 더 깊이 있고 큰 규모를 갖는 작품으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그는 곡의 전개 방식과 화성·악기 배치 등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추구하여 낭만주의 등 새로운 음악 사조가 탄생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음악가로 평가받는다.

후배 또는 후계자를 자청한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바그너, 브루크너 등을 위시해 수많은 음악가들이 베토벤의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을 정도로 음악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

21살의 베토벤 초상화(1801년)

빈에서 베토벤은 계획한 대로 요제프 하이든의 문하에 들어가서 가르침을 받게 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많이 달랐던지 하이든의 지도방식에 불만을 보였고, 하이든은 하이든대로 이전 스승 밑에서 했던 숙제를 그대로 제출했다가 들키는 등의 태도로 일관한 베토벤을 돼먹지 못한 녀석으로 취급했다.

그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잔치나 모임에서 연주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는데 그의 뛰어난 즉흥연주 능력은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기간이 끝났지만, 곧 리히노프스키 공작과 같은 든든한 후원자도 바로 나타났기 때문에 생계에 곤란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1795년에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등의 레퍼토리로 정식 공연에 데뷔한 후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작의 후원으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으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유럽 각지에도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1800년에는 1번 교향곡과 6곡의 현악 4 중주곡을 발표해서 성공을 거두면서 피아니스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물론, 모차르트나 하이든이라는 대선배 작곡가들의 영향 하에 있었으나 이후 발전하게 되는 그의 음악적 성과의 서광을 알리기에는 이미 충분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베토벤은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는, 음악가로선 치명적이라 할 만한 절망적 문제를 떠안게 된다.

베토벤은 귀가 들리지 않는 병을 알게 되고 나서 유서를 쓸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음을 들어야만 하는 음악가에게 ‘청각장애’는 사실상 사형선고에 준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 때문이었다. 이 무렵 그의 친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표정이 너무나도 어두워졌고 말수가 적어졌으며 사람 만나기를 꺼리며 엄청나게 괴로워했다고 전해져 있다.


이 시기에 하일리겐슈타트로 가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나 유서를 썼다고는 해도 자살기도까지는 가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그는 그 유서를 쓰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음악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고 새롭게 결의한다. 그래서 그 후로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예컨대, 1803년에 작곡한 <감람산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곡을 들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고뇌하는 예수의 모습이 귀가 들리지 않아, 고뇌하며 음악에 절실하게 매달렸던 베토벤의 모습과 묘하게 중첩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3살의 베토벤 초상화(1803년)

에로이카 변주곡(op. 35)과 2번 교향곡(op. 36) 이후의 베토벤은 선배 작곡가의 그늘에서 확연히 벗어나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1804년은 베토벤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자신의 3대 교향곡 중 첫 번째 작품인 3번 교향곡 <영웅>과 피아노 소나타 분야의 한 획을 그은 <발트슈타인 소나타(Waldstein Sonata, op. 53)>를 작곡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 영웅 교향곡에서 베토벤은 앞선 두 교향곡에 남아있던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자신만의 음악세계 구축에 성공한다.


기존 교향곡 작곡가들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장대한 전개부를 가진 1악장과 장송 행진곡을 도입한 2악장은 당시 음악적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실험적 시도였고, 이 시도는 음악사에서 ‘역대급’으로 불릴만한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고 ‘보나파르트’라는 제목을 달았다가,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격분한 그가 ‘보나파르트’라고 적은 표지를 갈갈이 찢고 ‘에로이카(영웅)’로 고쳤다는 일설은 음악계에서도 꽤 유명한 이야기이다.

1815년 이후,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하고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정세가 안정되었다. 정세가 안정되자 빈 청중의 음악상 유행도 바뀌어서 그 전보다 가볍고 경쾌한 음악이 애호되었다. 베토벤의 음악상 스타일은 이런 추세와는 거리가 있었던 탓에 창작 활동이 잠시 주춤하게 되었으나 그의 음악은 더 원숙해지고 깊은 경지로 들어가게 된다.

말년으로 갈수록 베토벤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는데 가장 큰 원인은 소송전까지 치르며 자식 없던 그가 데려온 조카 칼 때문이었다. 자식을 키워본 적 없는 그에게 조카를 제대로 양육하는 것까지는 무리였던 탓이었는지 죽을 때까지 조카와 대립 갈등하는 모습으로 힘겨워했다.

죽음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서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방문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2km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이 대작곡가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인들의 주선으로 죽기 직전에야 어렵게 만나게 된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악보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Die schone Mullerin, D. 795)>를 살펴본 후,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자네는 분명 세상을 빛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라며 그에게 충분한 용기와 격려를 남겼다.


그리고 슈베르트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는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서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1827년, 베토벤은 병자성사를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친구, 지인, 제자,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향년 56세.

베토벤의 묘비

그가 단지 음악가로서 뿐만 아니라 상당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일화를 통해 드러난다. 예컨대, 그가 아버지 때문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그래서 돈돈하며 돈을 밝힌 수전노 음악가였다는 오해를 하는 클래식 팬들도 많은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그가 유서를 쓴 곳으로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안정을 취할 당시 그 지역 작은 시골 악단이 베토벤을 찾아왔다. 지역을 상징하는 음악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그 유명한 베토벤 선생이 오신 걸 듣고 찾아왔다는 것. 다만 워낙에 시골이고 본격 연주보다는 마을 사람들과 농부들의 여흥을 위해 연주하는 수준인지라 작곡을 부탁하고 싶은데 그만한 돈이 없어 죄송하다는 부탁 아닌 부탁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적었다는 집

이에 베토벤은 이런 작은 마을에 음악단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가 대단하다면서 격려하면서 거의 헐값에 작곡을 해준다. 참고로 이때 베토벤이 작곡한 곡은 일실되었지만, 하일리겐슈타트 지역 악단에게는 대음악가가 작곡한 곡으로 길이 남았고, 그 악보와 관련 기록은 하일리겐슈타트에 있는 베토벤 관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 베토벤은 작곡이나 연주를 의뢰하는 귀족들에겐 터무니없을 만큼 거액의 거마비를 불렀다. 그것조차도 많이 준다고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을 보며 코웃음 치기 일쑤였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베토벤이 개무시하자 감히 후작인 나를 우습게 보느냐며 화를 낸 어느 귀족에게 차가운 눈으로 한 마디 던졌던 적도 있다.


“세상에는 당신 같은 후작은 얼마든지 있으나 베토벤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오.”

게다가 그는 상당한 수입이 있었음에도 40대 이후, 갈수록 옷차림이나 외모에도 신경을 쓰지 않아, 심지어 거리의 노숙자와 분간되지 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경찰관에 의해 노숙자로 오인받아 체포된 적도 있었다. 자칭 베토벤이라는 노숙자 영감을 미치광이 취급하던 경찰관은 뒤늦게 달려온 경찰서장이 그 사람이 진짜 베토벤이라고 확인해주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고 한다. 그 상황에서 베토벤은 경찰서장에게 이렇게 훈계했다고 한다.


“베토벤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더러 도둑은 어떻게 알아보라고 거기 세워 놓았소?”

한편 베토벤은 작곡가·음악가를 대상으로 한 저작권에 대해 신경 썼던 선구자였으며 당시 작곡가들이 귀족들의 후원금으로 생활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실행에 옮겼다. 제 아무리 귀족들이 돈을 많이 줘도 자신의 음악 작업에 간섭하면 가차 없이 쓴소리를 퍼부었고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신분해방을 주창했던 프랑스혁명을 동경했고, 나폴레옹을 숭배했던 이유도 프랑스혁명의 전파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가 황제에 오르는 정치적 행보를 보이자 분노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굉장히 유명한 일화가 바로 1812년 당시 작가로서 유럽에서 세계에서 가장 알아주던 괴테와 만난 이야기이다.

베토벤은 평소 괴테의 글을 좋아했고 괴테도 베토벤의 명성을 익히 알던 터라 둘은 무려 21살 차이에도 금세 친해져 대화가 끊어질 줄 몰랐다.

당시 일화를 그린 그림

하지만, 얼마 뒤 거리에서 오스트리아 황족 일행 혹은 어떤 귀족이 나타나자 괴테는 모자를 벗고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는데 베토벤은 모자를 쓴 채로 고개를 뻣뻣이 들고 황족 일행 사이를 거리낌 없이 지나갔다. 괴테가 나중에 그에 대한 태도를 지적하자 그는 괴테에게 실망한 듯이 말했다.

“당신과 나는 안 맞나 봅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다시는 괴테를 만나지 않았다.

저명한 베토벤 연구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에 의하면. 괴테도 나중에 그 일화를 회고하면서 베토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괴테는 “귀족들은 주어진 유산들로 인해 현실에 안주하지만, 귀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자는 노력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잠재성을 발현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당시 유럽 사회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공화정과 인간 평등사상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괴테가 이러한 귀족과 비 귀족의 차이를 분명하게 언급했다는 점은, 은연중에 귀족의 신분에 대해 열망했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같은 도시 빈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말년의 베토벤이 기거하던 하숙집에서 그를 만났는데, 베토벤은 그에게 <세빌리아의 이발사> 같은 좋은 곡을 많이 작곡하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후에 로시니는 자기처럼 별 볼일 없는 작곡가도 가슴에 훈장을 달고 유복한 생활을 하는데 이 위대한 음악가는 어떻게 저렇게 궁핍할 수 있느냐며 가슴 아파했다고 전한다. 그 정도로 베토벤의 생활은 마지막까지 청렴하기 그지없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통해 그가 음악가로서가 아닌 진정한 성인(聖人)이었음을 설명하고 싶지만, 이 시리즈의 목적이 그것이 아니고, 이미 너무 많은 공간을 할애했기에 이쯤에서 생략한다. 이미 악성(樂聖) 베토벤의 생애를 모티브로 하여 대하소설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로맹 롤랑 같은 소설가까지 있었기에 굳이 내가 더 많은 종이를 낭비할 필요는 없지 싶기도 하다.

자아, 당신이 어릴 적 그저 막연하게 들었던 귀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끝까지 작곡을 했다는 인간승리의 대명사, 베토벤의 삶이 좀 더 명확하게 보였는가?

베토벤도 처음에 그러하였지만, 일반인이라면 눈이 보이지 않는 이가 화가로서의 인생이 그 순간 끝나버리듯 음악가로서 음악이 들리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베토벤의 음악이 그 심오함을 갖기 시작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그가 청력을 상실하게 된 시기와 맞닿아 있다. 실제로, 베토벤이 청력이 악화된 이후, 사람들과 만나 사교생활 대신 독서와 사색을 즐기며, 오히려 그런 생활들이 그의 음악적 깊이가 형성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연구는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베토벤은 당시에 청력을 상실한 고통을 잊기 위해 실제로 호메로스, 셰익스피어 등 대문호들의 작품에 빠져들었고, 칸트와 인도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당대의 대문호인 괴테나 쉴러의 작품도 열독하였다.

합창 교향곡 음반

당신이 알고 있는 <합창 교향곡>의 초연은 1824년 5월 7일 빈에서 있었다.

그런데 당시 관객들은 두 개의 포디움과 두 명의 지휘자라는 괴상한 무대를 보아야 했는데, 이는 자신이 작곡한 <합창 교향곡>의 지휘를 반드시 직접 해야겠다는 베토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였다. 난감해진 극장 측은 결국 빌헬름 움라우프를 보조 지휘자로 무대에 올렸고, 악단원들은 두 명의 지휘를 동시에 보며 연주해 나갔다고 한다.


마지막 4악장까지 끝난 후 베토벤은 청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해 우두커니 서 있었고, 알토 가수 웅거가 그를 부축해 돌려세워 청중의 엄청난 환호 장면을 보여주자 비로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를 돌려세워준 웅거는 베토벤이 작곡한 곡의 고음 파트가 너무 어렵다며 수정을 요청했다가 눈물 쏙 빠지게 혼이 났던 적이 특별한 인연이 있던 가수였다.

당신에게는 이만한 정열과 열정이 과연 있는가?

달리기 선수에게 다리가 잘리는 사고가 생기면 좌절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노래하는 가수에게 병으로 인해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된다면 좌절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것을 그것에 걸었던 이들은 자연스레 죽음을 생각할런지도 모르겠다.

사람인데, 왜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베토벤은 똑같은 좌절과 똑같은 슬픔 속에서 유서를 쓰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유서는 죽기 직전 정말로 죽을 마음을 먹고 쓰는 것이지, 연습이 아니다.

죽음의 바로 앞까지 직접 걸어갔다가 깨달음을 얻은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작품들을 우리에게 선사하였고 그 음악은 지금도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한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이유모를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실제 그가 우리 전해주려던 이유가 그가 만든 선율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복수가 찬 상태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서, “배에 물이 차는 건 괜찮아, 머리에 물이 차면 곡을 구상할 수조차 없잖아”라고 농담을 던진 그의 순수하고 담담했을 죽음을 맞이하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럼에도 당신이 지금 외적인 이유로 사업이 실패하고, 시험에 떨어지고, 하고자 했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좀 인생이 지체된 것만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그렇게 좌절해야만 할 일인가?


손가락이 잘렸다고 죽겠다고 한강 다리에 올라선 이의 눈에 한쪽 팔이 없는 이가 웃으며 서핑을 하는 것을 보고서도 다리에서 뛰어내릴까 말이다.

사지 멀쩡하고 당장 죽는 일 아니면...

괜찮다.

다 복구할 수 있다. 다 회복할 수 있고, 더 나은 삶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절대 그 작은 시련에 무릎 꿇지 마라.

일어나 당당히 앞을 향해 걸어라.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당신도 알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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