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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Oct 22. 2021

이슬람군에 패해서 군대 지휘권까지 빼앗기고 말았지만

오히려 항해에 집중하여 대항해시대를 연 ‘항해왕’으로 추대받다.

1394년 3월 4일 포르투갈에서 주앙 1세(João)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손녀인 필리파(Philippa of Lancaster)이다.


1414년에는 아버지 주앙 1세와 함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북쪽 해안의 세우타(Ceuta) 공격에 참여했다. 포르투갈은 이듬해 세우타를 점령해서 북아프리카에 거점을 확보했는데, 왕자는 세우타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왕자는 이 일을 계기로 이슬람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인도나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과 교역할 수 있는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뜻을 품게 되었다

포르투갈 아비스 왕조(Dinastia de Avis)의 제1대 왕인 주앙 1세(João I, 재위1385∼1433)의 셋째 아들로, 초대 비제우 공작(Duque de Viseu)이었던,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을 잇는 아프리카 서부 항로의 개척을 추진해서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주도한 ‘항해왕(O Navegador)’ 엔히크 왕자(Infante Dom Henrique)의 이야기이다.


포르투갈 최남단 알가르브(Algarve)의 사그르스곶(Ponta de Sagres)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고 해서 ‘사그르스의 왕자(Infante de Sagres)’라고도 불린다. 이름 앞에 붙은 ‘인판테(Infante)’라는 단어는 셋째 왕자로서 후계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1418년에 무슬림 세력이 연합해 세우타를 공격하려고 하자 리스본에 있다가 군대를 준비해 세우타로 향했으나 현지의 포르투갈 부대가 무슬림 세력을 모두 격파했다. 그라나다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도 했지만 주앙 1세가 원정을 중지시켜 리스본으로 돌아갔으며, 1419년에는 알가르브 총독에 임명되어 유럽 남서쪽 포르투갈 최남단의 사그르스곶에 ‘왕자의 마을(Vila do Infante)’을 만들어 조선소와 항해술ㆍ지도제작법 등을 가르치는 학교까지 세웠다. 그리고 탐험가들을 후원해 아프리카 서부의 항로 개척을 추진하여 1420년부터 탐험대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대항해시대 기념비

탐험대의 파견을 통해 포르투산투, 마데이라 섬 등을 발견했고 페레스트레루를 포르투산투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엔히크는 탐험가들이 마데이라 섬의 나무가 너무 울창하고 덤불이 무성해 평평한 땅을 만들 수가 없어서 나무를 불태운 것을 알고는 포도를 심으라고 해 이후부터는 마데이라가 포도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엔히크 왕자의 후원으로 1419년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João Gonçalves Zarco)와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Tristão Vaz Teixeira)가 마데이라제도를 발견해 해당 지역을 모두 식민화하였다. 그리고 1427년에는 곤살루 벨류(Gonçalo Velho) 등이 아조레스제도를 발견했다.

 

1433년에 주앙 1세가 죽고 형 두아르트 1세(Duarte I, 6년간 재위)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포르투갈을 비롯한 모든 유럽인들이 당시 보자도르(Cape Bojador) 곶 남쪽 질 이아느스(Gil Eanes)에는 펄펄 끓는 암흑의 녹색바다가 있고 악마가 살고 있다는 미신이 퍼져 그 곶을 함부로 탐험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엔히크가 보낸 질 이아네스 등의 탐험가가 1434년에 보자도르 곶을 넘어서 돌아오는 데 성공하면서 오래된 미신을 최초로 극복해버린다.

아프리카 탐험에서 경제적인 이득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지만 엔히크 왕자의 지원과 명령으로 1441년에 원정대가 사금 덩이와 흑인 2명을 잡아오면서 탐험과 항로 개척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증명을 확실히 해 보였으며, 1443년부터는 보자도르 곶 남쪽에 대한 항해와 교역권을 독점하게 된다.

 

이처럼 엔히크 왕자가 주도한 항로 개척이 성과를 거두면서 엔히크 왕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새로 왕위에 오른 형 두아르트 1세(Duarte I, 6년간 재위)에게서 보자도르곶 남쪽 지역에서 얻는 이익의 5분의 1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1437년 엔히크 왕자는 북아프리카의 탕헤르(Tánger) 공격에 나섰다가 이슬람군에 대패하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 동생인 페르난두 왕자(Fernando, o Infante Santo)가 포로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게 된다.

 

1438년에 왕이었던 형 두아르트가 죽고 아들인 아퐁수 5세가 재위했는데, 아퐁수 5세가 어려서 어머니인 레오노르 데 아라곤이 섭정을 맡는 것을 지지했다. 그의 형인 페드루가 레오노르의 반대편에 서서 레오노르를 쫓아냈음에도 엔히크는 궁정이나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권력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엔히크 왕자는 코임브라 대학에 천문학 강좌를 개설하는 등 체계적으로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을 지원하였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포르투갈은 3개의 마스트를 지닌 선박인 캐러벨(Caravel)을 이용해 원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이 급성장하는 면모를 보여준다.


1441년 누누 트리스탕(Nuno Tristão)과 안탕 곤살베스(Antão Gonçalves)는 지금의 모리타니(Mauritania) 해안의 라스누아디부(Ras Nouadhibou) 반도에 도달했고, 1443년에는 아르갱 만(Baie d'Arguin)까지 이르렀다.

포르투갈이 항해당시 사용했던 카라벨선

그리고 1444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의 아버지인 디니스 디아스(Dinis Dias)가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 끝인 베르데곶(Cap Vert)에 이르렀다. 1450년대에는 카보베르데(Cabo Verde) 군도를 발견했고, 1460년대에는 지금의 시에라리온 연안까지 도달했다. 이로써 엔히크 왕자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을 잇는 항로를 개척하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었다.

엔히크 왕자는 1460년 11월 13일에 사그르스에 있던 자신이 세운 왕자의 마을에서 눈을 감았다.

여러 탐험가들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으로 성과를 얻으면서 아프리카 탐험에 대한 독점권, 노예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얻었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왕, 교회, 기사단, 부하, 해상왕국의 후계자 등에게 양도했다. 그가 죽은 뒤에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부 항로의 개척을 계속 추진하여 1488년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에 이르렀다.

포르투갈 바탕랴 수도원에 있는 엔히크 왕자의 묘

이처럼 엔히크 왕자는 대항해시대의 문을 열어 포르투갈의 융성을 가져왔고, 포르투갈은 1960년 엔히크 왕자가 죽은 지 500년이 된 것을 기념해 그의 이름을 딴 국가훈장(Ordem do Infante Dom Henrique)을 만들었다. 그리고 1996년에는 최고액권 화폐인 1만 이스쿠두(escudo) 지폐에 그의 초상을 실었고, 이 화폐는 1999년 유로화가 도입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원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오랫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런데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각각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각자의 땅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게 된다.


포르투갈의 경우, 엔히코 왕자의 아버지였던 돈 주앙 1세가 1385년 세운 왕조가 바로 포르투갈의 역사상 두 번째 왕조였다. 세우타의 정복에 성공하고 형 둘은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지만 엔히크 왕자는 그 곳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그 곳에 남는다. 대개 본국과 떨어진 곳에 셋째 아들을 남기는 이유는 가장 덜 신임하거나 권력으로부터 멀리 두기 위함이다.

 

그러나 엔히크 왕자는 그것에 서운함을 느끼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이 새롭게 보는 것들을 통해 공부하고 견문을 넓혀갔다. 이슬람 상인들과 아프리카 상인들이 후추, 생강 등의 이국적인 동양의 물건을 교역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에서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를 맞게 한다.

그가 가리키는 곳이 바로 대서양이다

‘무역’이라는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렇게 다시 1418년에 본국으로 돌아간 엔히크 왕자는 아버지에게 무역만이 세계의 패권을 잡을 길이라고 설득한다. 그러자 돈 주앙1세는 그런 어린 아들이 기특하다고 최남단 지역의 총독으로 그를 임명한다.

 

권력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그 곳에 왕자의 말을 세우고 본격적인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작은 호기심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고, 포르투갈을 대항해시대를 선도하는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거국적인 대사업에 다름 아니었다.


바로 위의 형이 정권을 힘으로 빼앗고 왕이 되었고 권력싸움에는 관심이 없어 목숨의 위협을 받지는 못했지만, 정작 국가의 지원이 필수적인 항해 사업에 국가의 지원이 끊기고 만다.


때문에 14년 동안이나 엔히크 왕자의 항해 사업은 정체에 빠지고 만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바다 저 멀리 나간다는 두려움 때문에 항해에 지원하는 자원자의 수도 급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소수라도 항해만 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 갖춰지면 여지없이 탐험대를 지원하여 파견했다. 그렇게 그는 당시 모든 유럽인들이 두려워하던 미신을 깨부수며 1434년 보자도르 곶을 발견했고, 포르투갈의 항해의 지평을 확장했다. 무엇보다 원정대가 보자도르 곶에서 가져온 금덩이는 지원을 끊었던 형 페드루마저 놀랄 정도였다.


그런 소식은 유럽 전역에 삽시간에 퍼졌고, 교황마저도 엔히크 왕자의 항해 사업이 선교사업의 일환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엔히크 왕자와 그를 따르는 항해자들에게 큰 혜택을 주었다.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말이 좋아 발상의 전환이지, 한 나라의 왕이 되겠다고 형제간에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능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벌인 평생 사업의 흐름을 보면, 그가 결코 욕심이 없었다거나 야망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는 포르투갈 정도의 한 나라에 만족할만한 그릇이 아니었던 것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아프리카 전체를, 그리고 세계를 모두 끌어안을만한 그릇으로 자신의 평생을 바쳤다.

 

혹여, 본사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이리저리 눈치 보며 어떤 줄을 잡아야 할지 매일같이 눈치 보며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고, 손바닥에 손금이 없어져갈 지경까지 아부를 하며 자신의 영리 영욕을 위함이 아니라 가족을 먹여 살리고 싶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입에 발린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가?


그러다가 썩은 동아줄을 잡아 그것이 끊어져 지방발령이나 이름도 없는 외진 해외 발령이 나면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사표를 던지고 동네 치킨집 자리를 알아보나?


당신의 삶이 어찌 돌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당신이 지금 좌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신의 인생에 있어 하늘이 내려준 진정한 동아줄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제대로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기회는 평생이 겨우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진귀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패배한 인생이라고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겠다고 하는 그 상황에도 기회는 당신의 발 앞에 툭 놓여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당신이 알아보게 되면 기회인 것이지 당신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회고 뭐고 확인할 길도 없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앞에 놓인 그 모든 기회들을 전심전력으로 정면으로 부대껴 보려 하고, 어떤 상황에서라도 당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익히고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쓰레기라고 여겼던 황금 같은 기회가 당신을 찾게 된다는 말이다.


허황된 소리 하지도 말라고?

항해왕으로 살았던 엔히크 왕자의 삶을 보고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엔히크 왕자의 아버지가 포르투갈 역사상 두 번째 왕조를 세운 연도를 다시 한번 유심히 봐라.

그즈음에 한반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조선을 건국한 시기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물론 고려의 무신이었던 이가 이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 것도 결코 가볍게 볼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즈음의 시기에 망망대해를 건너 세계를 모두 품에 안을 것을 생각한 이가 있었단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다.

당신이 당신의 머리에, 그리고 당신의 가슴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의 꿈의 사이즈를 그렇게 한정 지어 조그맣게 축소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우주선을 타고 다른 행성에 가서 살 것을 계획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고작 좌천 좀 했다고, 지방발령받았다고, 시험에 떨어져 승진 못했다고, 해보려던 벤처가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아 운도 지지리도 없다고, 그 따위 생각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으로 바꾸란 말이다.


그러면 당장 당신이 어설픈 드라마 주인공 흉내 내며 소주잔을 기울일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간 까먹은 시간을 보충해야 할 것 아닌가!

일어서라,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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