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문자(季文子)는 세 번 생각하고 난 뒤에야 행하였다. 공자께서 이 말을 듣고 말씀하셨다. “두 번만 해도 된다.”
계문자(季文子)는 노(魯)나라의 대부로, 성은 계손(季孫), 이름은 행보(行父)이고 文(문)은 그의 시호이다. 계손씨는 노(魯)나라의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삼환(三桓) 중에서도 세력이 가장 큰 가문이었지만 계문자(季文子) 자신은 결코 횡포가 심하지 않아서 《사기(史記)》의 〈노세가(魯世家)〉에 의하면, 그가 죽었을 때 집에 비단옷을 입은 첩이 없고 마구간에 곡식을 먹는 말이 없고 창고에 금과 옥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조실록 권2》에서 유희춘(柳希春)이 선조에게 “계문자(季文子)는 양중(襄仲)이 적자를 죽이고 서자를 세울 때 권력을 잡은 대신으로서 역적을 토죄할 수 있었는데도 도리어 역적의 편당이 되었으니 큰 절의를 지킴은 보잘 것 없습니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한 평가가 이미 중국의 다양한 원전 서적을 통해 학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자는 이 장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季文子는 매사를 반드시 세 번 생각한 뒤에야 행하였다. 예를 들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진나라 임금이 병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상(喪)을 당할 경우 사신으로서 행해야 할 예를 미리 찾아보고 간 것과 같은 것이 그 한 예이다.”
위 주자가 언급한 사례는, 계문자가 진나라에 사신 가기에 앞서 진나라 군주인 양공이 병중이라는 말을 듣고, 그 나라 군주가 죽었을 경우 사신이 행해야 할 예를 미리 강구하여 갔었다. 그 결과 노나라는 예의의 나라로 더욱 인식되어 국가의 위신을 세울 수 있었다고 전한다. 이 내용은 《춘추좌전》 문공 6년조에 보인다.
정자(伊川)는 왜 공자가 세 번을 생각하는 것이 과하고 두 번이면 충분하다고 했는지에 대해 그 행간을 읽고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악한 짓을 하는 자는 애당초 생각함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생각함이 있다면 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두 번 생각함에 이르면 이미 살핀 것이요, 세 번 하면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어 현혹된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비판하신 것이다.”
이 해설은 생각함을 3단계로 나눠 설명한 것인데, 첫째, 잘못된 판단을 하는 자, 악의를 가진 행동을 가진 자는 악의를 한번 생각하고 결정하여 그대로 행하니 볼 것도 없고, 둘째, 그런 악의를 가지고 행동을 하려던 것을 다시 고쳐 생각하여 선의로 바꾸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즉, 행동하기 전에 자신의 행동에 어떤 잘못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으로 잘못을 바로잡기에는 충분하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셋째, 그것을 다시 또 맞는지 재고 생각한다는 것은, 사사로운 생각이나 욕망이 일어나 도리어 현혹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 번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완곡하게 말씀하신 공자의 말씀이, 보기에는 완곡해 보이나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본의를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다.
이 셋째에 해당하는 내용에 대해 주자가 설명하면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계문자가 그릇된 행동을 보였다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이 사례는 앞서 살펴보았던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는 바로 그 사례에 해당한다.
“내가 살펴보건대, 계문자(季文子)가 일을 생각함이 이와 같았으니, 자세히 살핀다고 말할 만하여, 당연히 잘못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선공(宣公)이 찬탈하고 즉위하자, 계문자(季文子)는 마침내 토벌하지 못하고 도리어 환공(桓公)을 위해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뇌물을 바쳤으니, 정자(程子)가 말씀한 ‘사사로운 뜻이 일어나 도리어 현혹된다.’는 증험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궁리를 힘쓰면서도 과감히 끊는 것을 귀히 여기고, 한갓 생각만 많이 하는 것을 숭상하지 않는 것이다.”
결론인즉, 그렇게 세심하게 3번이나 살피는 사람이라면 잘못하는 경우가 없어야 하는데, 오히려 그의 인생 족적에서 흠이 될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정자(程子)가 지적한 셋째의 경우에 해당하는, 우유부단하여 결국 사리사욕으로 일을 망치는 경우에 해당했다는 지적이 맞았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어릴 적, 다분히 내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시험을 볼 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원래 썼던 답을 고쳐 써서 단 한 번도 정답을 맞혀본 적이 없다. 늘 처음에 쓴 것이 그것이 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지식이 확실하지 않을 때, 나는 흔들렸고 그 유혹에 속아 또 후회를 해야만 했다.
물론, 어려서 그런 일이 몇 번 있고 나서 나는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
어떻게? 결과가 어찌 되든 더 명확하게 공부하지 못해 헷갈리는 것에 대한 책임을 늘 스스로에게 엄하게 묻는 방식으로 말이다.
뭔가 확신에 차서 생각도 없이 그것이 과단성 있는 행동이라면서 밀어붙이는 덜렁이도 문제지만, 도무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유부단하는 것도 꼴불견이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공자는 늘 제자들을 가르칠 때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과단성이 지나친 제자에게는 차분히 재고(再考)하는 신중함을 가르쳤고, 우유부단한 제자에게는 과단성 있는 판단과 실행력을 갖추도록 엄하게 회초리를 들었었다.
앞서 정자(程子)도 주자도 설명하긴 하였으나, 10센티정도 조금 더 나아간 내 생각을 말하자면, 실제로 준비가 철저하고 수양이 제대로 되어 있는 자는, 여러 번 수정하거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한번 결정을 내린 것에 대해 그것이 정말로 옳은 결정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하거나 다음을 생각하는 것까지는 검토 정도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이 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게 맞을까? 다르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그 이유에 대해서 공부하는 이들이 한번 제대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화두를 던진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다 보면 어려운 결정이 분명히 있다. 특히, 어느 하나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 게다가 그것이 자신의 삶을 바꿀만한 중요한 결정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흔들리고 고민되고 결정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확정하는 그 순간까지 내 결정이 옳은지 불안하고 혹시나 내가 결정하지 않고 버린 그것이 기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선택이고 그 선택을 하게 되고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 스스로가 지는 것이다. 중요한 선택에는 그만큼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는 자연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시험을 예로 들었으니, 시험 얘기를 조금 더 해보자.
시험을 준비할 때마다 학생들이 하는 말이 있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훨씬 더 잘 준비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의 말들이다. 그런데 그런 말을 정말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학생이 하는 것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다.
만약 조금이라도 시간이 더 있으면 완벽할 것 같은데,라고 하는 상황에 거짓말처럼 천재지변으로 인해 시험이 미뤄지면, 정말로 그는 완벽한 준비를 해서 시험에서 단 하나의 실수도 없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그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심심찮게 많이 일어났었다. 원래 준비를 못했던 학생은 졸지에 얻은 충분한 시간이 있어도 완벽한 점수를 받지 못했고, 원래 준비를 충실히 했던 학생은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어왔다.
당신이 그 불변의 사실을 몰라서 계속 그런 후회를 반복하며 사는 것인가?
앞서 계문자가 그러한 우유부단한 성향 때문에 잘못을 과감하게 처단해야 했음에도 그 타이밍을 놓치고 결행하지 못한 것이 평생 그의 결함으로 남게 되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할 부분이 있다. 내가 우유부단하고 내가 잘못해서 내게 잘못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신하가 자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게 되고, 앞서 신중했던 것에 대한 평가조차도 모두 부정받고 비판받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장의 해설을 하면서 자칫 그저 ‘내 직관을 믿고 적당한 선에서 밀어붙이세요.’라는 식으로 무책임한 귀결을 맺는 이들이 적지 않아 또 답답해졌다.
‘그러면 도대체 그 생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라고 따지듯 묻고 싶을 것이다.
머뭇거릴 줄 알았나? 아니. 기다렸다, 그 질문.
《중용(中庸)》에서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생각의 훈련 방식과 그것을 어떻게 실행으로 옮길 것인가에 대한 실천까지의 과정을 다섯 가지 구체적인 단계로 설명한다.
첫째, 박학(博學). 넓게 충분히 배워야 한다. 뭘 알아야 판단을 할 것 아닌가?
내가 이 논어 시리즈를 비롯해서 다른 연재 시리즈에서도 먼저 공부하고 또 공부하고 빈 머릿속을 채우고 나서 그다음으로 나아가라고 하는 것은 내가 그저 오래된 연식의 꼰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 이런 근거에 바탕해서 하는 말임을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둘째, 심문(審問). 앞서 배운 것들을 질문이 생길 때까지 철저하게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질문이 생길 때까지라 함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질문을 할 수 없다는 진리에 근거한다.
셋째, 신사(愼思).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이 장의 내용과 유관한 부분 되시겠다. 무작정 생각을 많이 하면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저 우유부단한 멍청이로 전락하고 만다. 여기서 말하는 생각은 언제나 실천으로 이어져 있는 생각이다.
여기까지 앞서 단계를 제대로 거쳐와 생각에 이르렀다면, 이제까지 그 과정이 없었던 시기의 자신의 관점과는 한 단계 진보한 다른 관점을 얻어내고 그 관점을 통해 생각할 수 있게 된다. 그 새로운 관점이라는 것은 자기만의 ‘기준’ 혹은 ‘원칙’이라는 것으로 확고해진다. 즉, 다른 누군가의 것이 아닌, 내가 나만의 공부와 생각으로 나에게 맞춘 기준과 원칙을 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기준이 확고해지게 되면 다른 외재적인 것에 흔들리거나 오락가락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넷째와 다섯째에 해당하는 명변(明辯), 독행(篤行)은 구체적인 실천과 연관되는 부분이니, 이후에 대한 부분이니 이후 《중용(中庸)》을 공부할 때 이야기 나누기로 하자.
이 장에 타이틀로 올린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 나온다.’는 말은, 바둑에 나오는 말이다. 오래 생각하고 이리저리 해봐야 결국 가장 안 좋은 수를 두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둑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다.
바둑은 한 수씩 둔다. 바둑에서 초급을 떼고 나면 배우게 되는 ‘수 읽기’라는 것이 있다. 내가 돌을 한번 놓고, 상대가 놓는 것을 가상으로 머리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 모든 경우의 수 중에서 가장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곳에 돌을 놓는 것이다.
말은 쉬운데, 과연 몇 수까지 수 읽기가 가능하며, 그 모든 경우의 수를 한정된 시간 내에 빠르게 계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부를 통해 가능해지면, 바둑이 시원시원해진다. 반대로, 계속해서 바둑판만 들여다보며 집중력을 잃어 어디에 둘지 주저하는 이들의 경우, 제대로 된 수 읽기를 하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신의 안을 부단한 공부로 꽉 채우고, 수차례 수련을 통해 수양하게 되면, 그 유사한 판단이 필요할 때 매번 주춤주춤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죽기 전에 반드시 죽음을 경험해 봐야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던졌던 독립투사들이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과정을 수백수천 번 거쳤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당신이, 그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날을 맞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당신의 비어있는 머리와 영혼을 꽉 채우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분발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