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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Nov 10. 2021

하나후다(花札)와 화투(花鬪) - 12월

오동나무에 봉황 -桐に鳳凰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445


 

오동나무는 왜 겨울에 꽃도 피지 않는데 12월의 하나후다를 상징하게 되었을까?

 

앞의 11월의 하나후다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한국에서는 11월로 쓰고 있지만, 일본의 하나후다에서는 12월에 해당하는 마지막 장이다. 이 패가 12월인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유는, 오동나무를 뜻하는 키리(きり, 桐)가 ‘끝’이라는 키리(きり, 切り)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맨 마지막을 의미하게 되었다.


오동(悟桐)의 ‘ごどう’와 봉황(鳳凰)의 ‘ほうおう’의 말운을 맞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최고에서 최하까지' 혹은, '맨 처음부터 맨 끝까지'라는 일본어 속어 ‘ピンきり’라는 말도 이 하나후다의 오동(桐;きり)에서 유래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역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조커패로서 순서가 중요하지 않아도 여겨 뒤섞였는데, 오동잎이 버드나무 잎보다 먼저 떨어진다고 여긴 서민들의 판단에 의해 순서가 바뀌게 된 것이다. 그려져 있는 새의 머리는 앞서 설명했던 봉황임에도 불구하고 오동을 알지 못했던 한국의 노름판에서는 생김새가 딱 닭같이 생겼다고 해서 ‘닭’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11월 패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11월과 12월의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는 둘 다 봄철에 피는 꽃이라 계절과는 맞지 않는다. 한 겨울에 해당하는 이 두 달은, 꽃피는 식물 자체가 없으니. 일본 하나후다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포르투칼의 카르타가 40장짜리였던 것에 1~10 그리고 잭, 퀸, 킹처럼 그림패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오동과 버드나무를 넣어 조커패 역할을 하도록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동나무는 일본에서 채취되는 나무 중에서도 비중이 가장 가벼운 나무로, 습기를 잘 먹지 않아 균열이 적은 나무로 예로부터 소중히 여겨 왔다. 또, 오동나무는 성장이 매우 빠른 식물이라서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여자아이가 태어나면 오동을 뜰에 심고, 그 여자 아이가 결혼할 때 그 오동나무로 장롱을 만들어 혼수품으로 한다는 풍습이 있었다.(한국에서는 대추나무가 그렇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오동은 불이 잘 붙지 않고 벌레를 막는다는 특징 때문에 옷과 허리띠 등, 중요한 의류를 넣는 가구는 물론, 골동품이나 편지, 금고의 재료 등에 사용되었다.

오동나무 가구에 봉황 문양

이렇게 현실적인 면에서도 여러모로 일본인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이기도 했지만, 사실 중국의 전통에서 온 오동의 의미는 그것이 일본에 전해졌을 때 전설과 함께 전해졌다.

 

원래 중국에서 오동이란, 모든 조류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꼽히는, 전설의 영조(霊鳥) ‘봉황(鳳凰)’이 머무다는 나무로 신성한 식물로 여겨졌다.

『장자(莊⼦)』의 추수(秋水)편에 “봉황(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고 예천(醴泉)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다.(非梧桐不止, 非練實不食, 非醴泉不飮.)”이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전설에 의하면, 훌륭한 왕(천자)이 즉위할 때 길조인 봉황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러한 중국문화의 전통이 그대로 일본에 전래되면서 왕가에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국화 무늬보다 옛날부터 황실에서도 계속 사용해왔다.

 

국화에 이어 가장 고귀한 꽃(식물)이라 생각하여, 황가(皇家)의 부문(副紋)으로서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전국시대에는 정치를 맡기는 무가(武家)의 가문이나 단체에 포상의 하나로 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미 전국시대 때부터 일본의 황실은 상징적인 정통성만 유지할 뿐 실권은 없었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 유서 깊은 혈통의 가문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관직이나 문장을 하사하는 방식으로 그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렇게 하사한 오동의 문양은 무가(武家)의 입장에서는, 이미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쌀이나 금, 은, 영토, 비싼 찻그릇, 명마 등보다 훨씬 더 큰 정치적 효과가 있어 정통성을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에 이 오동을 가문(家紋;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해도 된다고 허가를 받았던 가문은, 것은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확하게 말하자면 太閤桐이었기 때문에 오동과는 구분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등이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일본 정부의 국장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장의 오칠동(五七桐;ごしちのきり)은 하나후다의 12월에 쓰여진 그림과 거의 똑같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처음에 사용되었던 오동의 문장을 그대로 조금 바뀌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막부의 최고 권력자인 쇼군의 품격과 지위를 상징하던 문양은 오동과 어우러지는 봉황새의 머리였다. 그래서 정부는 물론, 지금까지도 국공립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에 심심치 않게 보이며 심지어 일본 화폐 500엔 주화에도 오동잎이 도안으로 들어가 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처음 하나후다에 이 문양이 12월의 패에 들어가면서 노름을 하는 서민들이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신분이 높은 이들의 물건에 해당하는 문양을 가지고 놀면서 서민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막부에 대해 억눌려있던 불만을 해소하는 배출구로, 당대 권력자를 상징하는 五七桐, 五三桐을 마음대로 패로 때리며 ‘무단 사용’하는 기분 전환용으로 활용한 것이 아닌가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이러한 오동이 한국의 화투로 변신하면서 잎이 녹색에서 흑색으로 바뀌면서 잎맥이고 뭐고 안 보이는 검정 덩어리가 됐다. 일명 오동의 ‘동’이라 발음했던 것이 한자어를 잘 알지 못하고 그 한자어가 갖는 의미를 명확하게 알지 못했을 노름꾼들이 발음하기 쉬운 된소리로 전성하면서 ‘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한국의 고스톱에서는 같은 패가 겹치게 내는 뻑, 이른바 ‘싸다’라는 말과 겹쳐지면서 정말로 똥을 싸다는 말로 이어지면서 이 패의 뻑을, ‘똥을 쌌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12월이라 연재가 길거라고 생각했는데, 매일같이 연재하니, 14일간의 연재가 후딱 지나가버렸네요.

재미있으셨나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것마다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지요. (이건 고전에 나오는 말로, 날림 지식 장사꾼 유 모 씨가 처음 한 말이 아닙니다.)


굳이 화투에 대해서 그 담긴 의미를 풀었던 것은, 그것이 명백하게 일본에서 옮겨온 문화라는 것과 그것을 정작 지금 일본인들은 즐기지 않지만, 왜색이 짙다며 왜색을 지우기만 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L.A. 공항에서는 한창 한국인들의 왕래가 많을 때, 하도 비행기를 기다리며 미국 신문지를 깔고 화투를 치는 한국인들이 많아, 이후엔 사행성 도박이라는 이유로 공항에서 화투를 법적으로 금지해버렸습니다.


오가는 미국인들과 서양인들이, 그리고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그 희귀한 광경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집니다.

 

일제의 것이라고 무조건 없애버리고 잘라버리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무언가를 깨닫고 실행하기 전에, 제대로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 공부하고 제대로 알고 나서 그다음에 생각을 통해 판단을 하고 실천에 옮기면 크게 후회할 일들이 적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 다음 어떤 주제로 연재할지는 아직 안 정했지만, 조만간 새로운 연재 시리즈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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