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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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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Dec 30. 2021

술의 기원 3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기 전에

지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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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는 술을 어떻게 빚었을까?

현존하는 우리 문헌만으로는 당시의 술 빚는 자세한 방법을 알아낼 수 있는 근거가 박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산둥반도를 무대로 하여 엮어진 『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는 매우 자세한 술 빚기의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당시의 술 제조 수준이나 지역적인 근접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책에 실린 술 빚는 방법이 바로 우리의 술 빚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기에 그 기록을 따라 당시에 어떻게 술을 빚었는지 고찰해보기로 한다.

 

누룩의 형태는 떡 누룩·섬누룩으로 불리는 ‘병국(餠麴)’과 낱알 누룩인 ‘산국(散麴)’이 있다. 이들은 주로 밀로 만들었는데, 병국은, 밀을 볶거나 찌거나, 날것 그대로를 섞는데, 그 방법과 섞는 비율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술을 만드는 것은 병국이 산국보다 많이 쓰인다. 이것을 물에 침지(沈漬)하여 이른바 ‘주모(酒母)’를 만든다. 술의 원료는 기장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료처리방법은 지에밥 5, 두 번 찐 밥 3, 죽 1, 설익은 밥 1의 비율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조법은 곡물과 누룩을 섞어서 단번에 발효, 숙성시키는 일이 많다. 이렇게 만든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지 않다. 알코올 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단 속성 시킨 ‘술 밑[醅, 醪]’을 걸러서 이를 물 대신 이용하여 다시 곡물과 누룩을 넣어 계속해서 발효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원료가 쌀인 경우에는 술 밑을 거르는 동안에 산화되어 맛이 확 시어질 염려가 있다. 이때는 거르지 않고 그냥 술 밑에 누룩과 쌀을 여러 차례 넣어준다. 그리하여 발효가 끝나면 단번에 여과해 버리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민요술』에 기록되어 있는 청주의 주조(酒糟)이다.

『제민요술』에는 누룩·물·곡물의 셋을 같은 비율로 섞어 술을 빚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일정한 규정에 따라 빚은 좋은 청주이다. 이른바 ‘법주(法酒)’이다. 식물약재를 쓰는 특이한 청주, 산국을 쓰는 청주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이러한 『제민요술』의 술빚기는 당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우리나라에는 물론, 이 방식 그대로 일본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것이 문화적 영향관계상의 학계의 추론이다.

 

소주는 한국 고유의 술이 아니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고려에는 찹쌀이 없기에 멥쌀로 술을 빚는다.”, “고려의 술은 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서민들은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 “잔치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사람이 마셔도 별로 취하지 않는다.” 등으로 고려의 술의 특징에 대해 논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기록들로 보건대, 고려시대에는 청주·탁주·예주의 다양한 종류의 술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동국이상국집』의 시에 “발효된 술 밑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제민요술』에서 기술하고 있는 청주는 당연히 기본적으로 술의 종류에 들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극기(金克己)는 “들합에는 탁주 채워 있네."라 하였고, 이규보(李奎報)의 시에는 “나그네 창자를 박주(薄酒)로 푼다.”고 하였으며, 또 이규보 자신도 가난한 때에는 백주를 마셨다고 하였음을 볼 때에 탁주를 ‘백주’ 또는 ‘박주’라 하면서 서민들이 마셨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는 ‘양온서(良醞署)’라는 부서를 두고 왕이 마시는 청주와 법주를 빚어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반도에 소주라는 물건이 드디어 등장한다.

소주를 타이나 인도네시아·서인도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만주어로는 ‘알키’, 우리나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 한다. 음의 유사함 볼 때에 그 전파경로가 짐작된다.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할 계획 아래 개성과 경상북도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었고, 이 지역은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소주의 명산지가 되게 된다. 김진(金縝)은 일본의 해안 도둑을 막기 위하여 경상도에 와 있었는데 소주를 몹시 좋아하여 술을 마시러 다니던 그의 무리를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는 기록도 전한다. 이리하여 소주가 최초로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문화의 흐름이 흘러가는 방식에 맞춰 1404년(태종 4)에 일본으로 전래되게 된다.

 

고려, 이미 다양한 술이 등장하기 시작하다.

고려에 소주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와인으로 대표되는 포도로 만드는 특수주로서 고려에도 포도주가 탄생한 바 있다. 고려 시대의 시 속에 포도주가 당당히 등장한다. 요즈음 포도주는 포도즙을 효모로 발효시켜서 만들지만, 당시의 포도주는 누룩·밥·포도즙으로 빚는 조금은 다른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정식 와인의 방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포도주는 지속적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한편, 『근재집(謹齋集)』에는 정월 초하루 밤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읊은 시가 나온다. 이 ‘도소주’는 후한의 화타(華陀)가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고, 당나라 때 손사막(孫思邈)이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정설이 어떤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약재를 청주에 넣어 두어 번 끓이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술이다. 또, 송나라의 ‘계향어주(桂香御酒)’를 이자겸(李資謙)이 소개하였다는 기록도 있고, 양이나 말의 젖으로 만든 ‘젖술’이 몽고에서 들어오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문학 속에 등장하는 다채로운  종류

 

고려의 문학작품 속에는 정말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술들이 기록되어 당시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던 문화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한림별곡』에 황금주(黃金酒)·백자주(柏子酒)·송주(松酒)·예주(禮酒)·죽엽주(竹葉酒)·이화주(梨花酒)·오가피주(五加皮酒)를 비롯해서, 이규보의 시 속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화주(梨花酒)·자주(煮酒)·화주(花酒)·초화주(椒花酒)·파파주(波把酒)·백주(白酒)·방문주(方文酒)·춘주(春酒)·천일주(千日酒)·천금주(千金酒)·녹파주(綠波酒)·동동주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만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술들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시나 글 속에서 녹주(綠酒)·청주(淸酒)·국화주(菊花酒)·부의주(浮蟻酒)·창포주(菖蒲酒)·유하주(流霞酒)·구하주(九霞酒)·탁주(濁酒)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만큼 다양한 제조방법을 통한 다양한 우리 땅에서 나온 재료들로 다양한 술을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이들 술의 제조법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문헌을 보이지 않지만, 그 이름만은 우리 고유의 것들인 것으로 추정컨대, 기본적인 술 제조방식은 비슷하되, 우리 땅에서 나는 재료들이나 술로 만들면 좋았을 법하는 것들은 거의 모두 사용하지 않았는가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다채로운 술의 종류를 보여준다.


이러한 술 제조 문화와 향유 문화는 고려에서 조선시대로 대부분 이어지고, 조선시대의 문헌 속에서는 드디어 당시 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 언급된 문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 기록된 우리 술, 만드는 법.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누룩부터 만들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서는 보리·밀가루를 녹두즙과 여뀌와 더불어 반죽하여 잘 밟아서 ‘막누룩(떡누룩)’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1670년(11)경의 『음식디미방』에서는 밀기울을 반죽하여 꼭꼭 밟아서 만든다 하였으니 이른바 막걸리용으로 사용하는 ‘거친 막누룩’이다.

 

1766년(영조 42)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술 빚는 방법이 집대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우선 누룩을 디디는 데 길일(좋은 날)을 택해야 한다고까지 설명한다. 술이 제사에 사용하는 주요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누룩의 재료는 밀과 쌀이 주가 되고 녹두가 다음이며 보리는 드물지만 사용하기는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밀은 잘게 쪼갠 알갱이를 쓰고, 쌀은 곱게 가루 내어 이용하고, 쌀알갱이에 밀가루를 부착시킨 것도 있다. 사용 방식은 가볍게 쪄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날 것을 사용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룩의 형태는 대부분 떡처럼 생긴 ‘섬누룩’이지만(약 90%), 일부는 쌀알갱이를 그대로 쓰는 ‘낱알 누룩’(약 10%)도 있다. 쌀누룩·낱알 누룩은 우리 전통의 것이 아니고 일본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조선 시대에는 이런 누룩들도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1823년(순조 23)의 『임원경제지』에는 여러 종류의 중국 누룩이 소개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그 방식을 활용했다는 기록은 없다. 즉, 중국의 누룩으로 술을 빚는 것은 시도되지도 않았다. 아마도 추정컨대, 자기 땅에 맞는 자기 방식에 맞추는 것이 입맛에도 맞다고 여겼던 탓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술의 종류 및 제조법

조선시대의 술은 크게 발효주와 증류주로 크게 나누어진다. 발효주와 증류주의 두 가지를 혼용한 술도 있는데, 예컨대 약재나 꽃향기·색소·감미료 등을 첨가한 재제주(再製酒)나 특수한 방법으로 만든 술이 그 예외에 속하는데, 워낙 변형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에 그 종류는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순발효주로는 백하주(白霞酒, 방문주)·삼해주(三亥酒)·연엽주(蓮葉酒)·소국주(小麴酒)·약산춘주(藥山春酒)·경면녹파주(鏡面綠波酒)·벽향주(碧香酒)·부의주(浮蟻酒)·일일주(一日酒)·삼일주(三日酒)·칠일주(七日酒)·잡곡주(雜穀酒)·하향주(荷香酒)·이화주·청감주(淸甘酒)·감주(甘酒)·하엽주(荷葉酒)·추모주(秋牟酒)·죽통주(竹筒酒)·두강주(杜康酒) 등이 있다.,

 

꽃·열매·약재 등을 넣고 함께 발효시키는 것으로는 도화주(桃花酒)·지주(地酒)·포도주(葡萄酒)·백자주·호도주(胡桃酒)·와송주(臥松酒)·백화주(百花酒)·구기주(枸杞酒)·오가피주·감국주(甘菊酒)·석창포주(石菖葡酒) 등이 있다.

 

순발효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내는 것으로는 소자주(蘇子酒)·지약주(漬藥酒)·감국주·구기주·복령주(茯苓酒)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순발효주 제조법을 『증보산림경제』를 통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덧술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발효시키는 단양법(單釀法)이 순발효주 전체의 45%이며(주모를 쓰는 경우와 쓰지 않는 경우 모두 포함), 덧술을 한 번 하는 이양법(二釀法)이 43%, 두 번 덧술 하는 삼양법이 12%이다.

 

원료 곡물은 멥쌀과 찹쌀의 비율이 6 : 4이고, 잡곡(조·기장·보리 등)은 거의 무시될 정도이다. 재료 곡물의 처리 방법은 밥 또는 지에밥 5, 범벅 모양 3, 구멍 떡과 같은 떡의 형태 1, 쪄낸 가루 1의 비율이다.

 

중국에는 지에밥 모양의 것이 가장 많고, 범벅 모양은 매우 적고, 떡의 형태는 아예 없다. 일본은 밥 모양뿐이고 그 밖의 것은 없다. 범벅 모양의 것이 많고 떡 모양이 있는 것이 우리나라 곡물 처리법의 특징이다.

단양 또는 이양의 순발효주의 술밑에 용수를 박아서 그 속에 괸 술을 퍼낸 것이 ‘청주’인데, 이것을 조선시대부터는 ‘약주’라 부르게 되었다. 약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왜 약주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에서 서성(徐渻)의 집에서 만든 청주가 매우 좋았고,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이며, 그가 살고 있던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청주를 약주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백하주·향온주(香醞酒)·소국주·경면녹파주·벽향주·청명주·석탄주(惜呑酒) 등이 약주에 속한다.

 

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한 청주의 이름에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춘(春)’자를 붙였으므로 우리도 그 문화방식에 따라 ‘춘’을 붙였다고 한다. 호산춘(壺山春)·약산춘(藥山春) 등이 그 방식에 의해 이름 지어진 술에 속한다. 비록 ‘춘’자가 붙지는 않아도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술로는 삼해주(三亥酒)·백일주(百日酒)·사마주(四馬酒)·법주(法酒) 등이 있었다.

 

다음 편은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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