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술 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Jan 12. 2022

바이주 종류가 왜 이리 많은 거죠?

중국 명주 기행 7

지난 이야기.

https://brunch.co.kr/@ahura/674

◦ 타패국(沱牌麯)

타패사득주(沱牌舍得酒)는 서한시대부터 양조를 시작한 깊은 역사를 지닌 

중국의 명주(名酒)인 타패(沱牌)의 독특한 양조기술로 승화된 프리미엄급 브랜드이다.

타패(沱牌)의 사득주(舍得酒)는 2001년 출시했다.


• 산서(山西)

 

◦분주(汾酒;펀지우) - 5차례 금상 수상

펀지우(汾酒)의 원래 산지는 산시 성(山西省) 분양현 행화촌(杏花村)이다. 분양지역의 옛 이름이 분주(汾酒)였기에 술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했다. 1,500여 년 전의 남북조(南北朝) 때부터 술을 빚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술은 당시부터 왕에게 바치던 술이었다.


남북조 시대 북제(北齊)에 무성제(武成帝)라는 임금이 있었다. 그는 여자와 술에 탐닉하며 방탕하게 세월을 탕진하며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당대 최고급 술만 즐겼던 그의 편지에 펀지우가 등장하면서 최고의 술로 꼽은 것이 알려지면서 펀지우는 더욱 유명해지게 된다.


청나라 소설가 이여진(李汝珍)은 <경화연(鏡花緣)>이라는 작품에서 전국 유명 술 50여 종 가운데 ‘산서 분주’를 맨 앞에 꼽았다. 마오타이주도 이 펀주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 첫 술의 이름이 ‘마오타이에서 만드는 펀주’였다고 전한다. 2007년 행화촌 분주 양조 공법은 중국의 무형문화재에 선정되었고, 2008년 ‘중국 명품 주류 첫 동네’ 선정 행사에서 행화촌(杏花村)은 ‘중국 주류(白酒)의 첫 동네’로 선정된다.

펀지우는 문화유산인 기술과 전통 발효방식 그대로 생산하는 것을 그들의 자랑으로 삼는데, 펀지우의 질이 좋은 이유로, 물, 누룩, 전통 기술을 꼽으니 전통을 고수하는 마케팅을 유지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프리미엄 전략을 선택한 마오타이주와 달리, 펀지우는 더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대중주를 지향한다는 전략을 추구한다. 행화촌에 있는 펀지우 생산단지는 대지 500만 제곱미터로 여의도 면적의 2배 가까이 된다. 여기에 2000년대 들어 청화(青花), 국장분주(國藏汾酒) 등 프리미엄 라인을 앞세워 다시 주목받고 있다.

 

• 섬서(陝西)

 

◦서봉주(시펑지우; 西鳳酒) - 4차례 금상 수상

서봉주 국장 30년

서봉주는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서안에서 약 180km 떨어진 바오지시(寶鷄市) 펑샹현(鳳翔縣) 류린진(柳林鎭)의 지방 전통 명주이다.

펑샹성(鳳翔城)의 옛 이름이 옹성(甕城)이었는데, 춘추시대 ‘오패(五霸)왕’중 한 명이던 진(秦) 목공(穆公)의 도읍지였다.


이 곳은 당대(唐代)의 수도에 버금갈만한 ‘시푸(서부;西府)’로 승격되었는데, 시푸펑샹(西府鳳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면서 이곳의 명주 이름으로 줄여진 이름인 서봉주(西鳳酒)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서봉주(西鳳酒)는 은나라 때부터 시작되어 당송(唐宋) 시기의 전성기를 거쳐 3000년의 역사를 가진 유래가 깊은 술이다. 옛날에는 진(秦) 왕의 어주(御酒)로 ‘진주(秦酒)’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고, 류린진(柳林鎭)에서 생산된다고 하여 류진주(柳林酒)라고도 불렸다. 기원전 139년 중요한 외교 예물로 이 술이 사용되면서 실크로드를 통하여 중앙아시아, 서부 아시아로 전해지기까지 하였다.

 

순하면서 뒷맛이 깔끔해 북송(北宋) 시기 저명한 문학가였던 소동파(蘇東坡)가 즐겨 마신 술로도 더욱 유명해졌다. 소동파는 펑샹현에서 첨서판관(簽書判官)으로 있을 때, 호수 근처에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술을 즐겨 마셨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다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데, 그가 지은 명문장 ‘희우정기(喜雨亭記)’가 바로 이곳에서 지어진 것이다. ‘유림의 술과 동호의 버드나무는 모두 아낙네의 손으로 만든 것처럼 공교롭다.(柳林酒 東湖柳 婦人手)’라고 자랑했는데, 유림주가 곧 유림진에서 생산되었던 서봉주를 의미한다.

서종두 국화자 50년

서봉주(西鳳酒)는 술의 향기가 뛰어나며 색은 맑고 투명하다. 앞서 분류에서 살펴보았던 청향과 농향이 섞인 봉향(鳳香)형의 술이며,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 향긋한 맛 등 오미(五味)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고, 맛이 부드러워 당나라 고종이 감탄했다는 고사도 전해진다.

 

봉향의 양조기술을 살펴보면, 먼저 농향을 내는 니교(泥窖) 대신 토교(土窖)를 이용해 농향의 달달한 성분을 제어한다. 그리고 나서 청향형 대곡(大曲)의 원료가 되는 보리, 완두와 농향형 대곡(大曲)의 원료가 되는 밀을 이용해서 만든 누룩을 이용해서 만든 청향과 농향이 섞인 독특한 향을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바이주 양조방법과는 다르게, 대형 숙성 용기인 주해(酒海)라는 것을 이용한다. 주해(酒海)란, 싸리나무 가지로 엮어 만들어 거대한 바구니처럼 생긴 물건이다. 그 내부를 일랍과 유채기름 등으로 봉합하여 건조시키면, 흙 항아리보다 견고하고 빈틈없는 주해가 완성된다. 용기의 높이는 2~2.5m정도로 일반 항아리보다 통기성이 좋다.

 

그렇게 연속 발효법을 사용하여 2주정도 발효를 시킨다. 서봉주(西鳳酒)의 생산 주기는 1년이며, 한번 사용했던 발효지를 재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발효지를 만들어서 사용한다. 3년 이상 저장한 후, 정성스럽게 뒤섞는 과정을 거쳐 출시하게 된다.

봉향형을 만들어내는 주해(酒海)를 활용하여 3년 이상 저장하면 형조(싸리나무의 일종)와 주해 내부에 바른 도료들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향미 물질이 균형을 이루고 청향과 농향의 특징과 장점을 두루 갖추게 되고, 오미(五味)가 조화를 이루어 서봉주(西鳳酒)의 독특한 맛과 봉향을 완성하게 된다. 기본적인 서봉주(西鳳酒)의 숙성기간은 3년이지만, 프리미엄으로 나오는 것들은 20년 이상의 숙성기간을 갖는다.

 

수년 전 서봉주(西鳳酒)의 프리미엄 모델인 국전봉향 50년 년분주(国典凤香50年年份酒2012珍藏版)에서 기준치의 약 3배 이상에 달하는 가소제가 검출되었다 하여 이미지에 타격을 입기는 하였다.

 

• 안휘(安徽)

 

◦고정공주(古井貢酒) - 4차례 금상 수상

본래 구온춘주(九醞春酒)라고 불렸던 전통주인데 현대화하면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조조(曹操)가 헌제(獻帝)에게 바쳤다고 알려진 술로, <제민요술(齊民要術)>이라는 책에 따르면 건안(建安) 연간(年間)에 헌제(獻帝)에게 이 술을 바치면서 만드는 법을 아뢰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의 고향인 남양(南陽)에서 곽지(郭芝)가 만들었다고 하면서 술을 만드는 법이 기술되어 있다.


만들 때 누룩 20근을 흐르는 물 5섬에 쓰고 섣달 2일에 누룩을 담갔다가 정월에 해동하며, 좋은 쌀을 쓰고 누룩 찌꺼기에 잘 걸러낸다. 3일에 한 번씩 술밥을 넣으면서 아홉 번이 되면 그친다.


조조(曹操)가 이 방법으로 술을 빚으니 좋았다고 하면서 이 방법으로 술맛이 없다면 9번이 아닌 한번 더 해서 10번까지 늘이면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술은 역대 황실에 바치는 상품이 되어 명나라, 청나라 때도 진상되었다.

 

일각에는 조조가 좋은 술로 황제를 홀렸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정사를 살펴보면 조조는 이미 하늘을 찌르는 권력의 소유자였기에 굳이 황제에게 술로 호감을 살 필요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오래된 우물로 주조한다고 해서 ‘고정주(古井酒)’라고 불렸다가 명나라 때부터 황실의 공물로 고정공주라는 이름으로 변했으며, 현대에는 안후이성 보저우시에 위치한 ‘안휘 고정 공주’라는 회사에서 이 술을 생산하고 있다.

이 오래된 우물의 물은 PH가 높고 여러 성분이 녹은 알칼리 광천수이며, 가뭄이 들어도 마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삼국지의 조조 뿐만 아니라 남북조시대의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고로가(高爐家)

 

• 하남(河南)

 

◦보풍주(寶豊酒) - 청향형 바이주의 최고봉

보풍주(宝丰酒)는 허난 성 평정산시(河南省平顶山市)보풍현(宝丰县)에서 생산된다. 아래 바로 나오는 ‘송하량액(宋河粮液)’과 함께 중국 허난성(河南省)을 대표하는 명주이기도 하며, 분주와 황학루주와 함께 3대 청향형 바이주로 중국 바이주의 대표주자이다.


앞서 살펴보았던 중국술의 시조로 언급되었던 의적(仪狄)이 만들어서 하나라의 우(禹) 임금에게 받쳤다고 했던 술이 바로 이 보풍주(宝丰酒) 되시겠다.

 

보풍현(宝丰县)은 상주(商周)시대에 응나라(應国)의 땅이었는데, 발굴된 응나라의 유적지는 지금의 보풍현(宝丰县) 동남쪽 10여 km 거리에 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술과 관련된 유물만 3000여 점이나 된다고 하니, 기록과 유적만으로도 보풍현(宝丰县)은 중국 술 역사의 한 조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풍주(宝丰酒)의 역사는 당흥송성 (唐興宋盛)으로 표현하는데, 당대(唐代)에 일어나고 송대(宋代)에 성행했다는 뜻으로 당대(唐代)에는 국가 공주(贡酒)로 지정되어 궁궐로 진상되었던 술이다. ​

당시 보풍(宝丰)은 ‘万家立灶千村飘香,烟囱如林酒旗似蓑.(집집마다 부뚜막이 바쁘고, 천지가 향기롭고, 굴뚝이 숲을 이루고, 술집 깃발이 풀잎처럼 많았다.)’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양조사업이 번창하였으며, 조정에서도 특별히 관료를 파견하여 감찰하고 관리를 할 정도였다.

금(金)나라때 보풍(宝丰)의 양조업은 더욱 성행하여 1000톤 이상을 생산해낼 수 있는 양조장만도 100여 곳이 넘었고, 양곡과 술의 거래가 거리마다 넘쳐났다.


보풍주(宝丰酒)의 매력을 표현하는 유명한 문구 중에 ‘南不過汝 北不過沙(남쪽으로는 여를 넘지 못하고 북쪽으로는 사를 건너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여(汝)’와 ‘사(沙)’는 보풍현의 남쪽과 북쪽에 흐르는 두 강(江)의 이름이다. 이 말의 속뜻은 보풍(宝丰)을 떠나려던 사람도 ‘여강’와 ‘사강’를 건너려는 순간, 성안에서부터 확 퍼져 나와 단번에 심중을 휘어잡는 술 향기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포기하고 다시 되돌아와 술잔을 들게 된다는 의미이다.

1948년 민간 양조장들을 기반으로 보풍주공장(宝丰酒厂)이 설립되었으며, 1997년 하남성보풍주업진단유한공사(河南省宝丰酒业集团有限公司)로 변모하고, 정통 양조법으로 지금까지 부단히 생산 중이다.


보풍주(宝丰酒)는 전통적으로 특이하게도 싸리나무를 엮어 내벽에는 동물의 피와 석회 등을 접합제로 뽕나무 껍질과 백면포를 수백 차례 붙인 다음 밀랍과 기름들을 발라 코팅하여 만든 식물성 항아리에 술을 담아 숙성시키는 양조법을 택하고 있었으며, 이 양조법은 2008년 중국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근대에는 생산의 효율성을 고려하여 정통 양조법은 개량되어 땅속에 항아리를 묻어 저장 숙성하는 지항양조법(地缸工艺)을 사용한다. 보풍주(宝丰酒)는 이 지역에서 나오는 양질의 수수를 원료로 밀, 보리, 완두로 누룩을 만들어 당화 발효제로 사용한다. 전통적인 청증2차청공법(清蒸二次清工艺)와 시멘트교지(窖池)발효, 찜통 증류, 지강(地缸) 장기 숙성, 심오한 브랜딩 등을 거쳐 완성되어 맛도 개성적이고 독창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바이주와 달리 문화적 색채가 매우 짙다.

당대(唐代)의 ‘주선(酒仙)’이라 불렸던 시인 이백(李白)은 ‘三杯通大道,一斗合自然.(세 잔이면 이치를 깨닫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일된다.)’라는 시구로 보풍주(宝丰酒)를 찬양했다.


◦송하량액(宋河粮液)

짜오지진(棗集鎭)이 있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루이현(鹿邑縣)은 노자가 태어난 곳으로 도교 문화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오늘날 바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명주가 바로 ‘송하량액(宋河粮液)’이다.

 

노자를 존경한 공자가 일생 중 두 차례 직접 그를 찾아가 만났다는 기록은 여러 사서(史書)에 전한. 그 문헌들에 따르면 공자는 기원전 503년과 518년 두 번에 걸쳐 하남(河南) 녹읍(鹿邑)에 가서 노자를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노자가 기원전 571년, 공자가 기원전 552년에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첫 방문으로 시기로 보면, 당시 노자는 53세, 공자는 34세였다.


열아홉 살 연장자에게 예를 올리며 공자가 배움을 청했고 노자는 제 고향 조집(棗集)의 좋은 술을 내어 그를 환대했다고 전한다. 이때 내어 대접한 술이 바로 조집주(枣集酒), 지금의 ‘송하량액(宋河粮液)’이라고 한다.

 

천하를 주유하는 과정에서 공자가 천하의 명주를 품평하는 일이 적지 않았는데, 그럴 때마다 조집주(枣集酒)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노자와의 이런 연분이 무관치 않을 듯싶다. ‘술을 마실 때 정해진 양은 없지만 난잡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惟酒無量 不及)’라는 논어에 나오는 말도 조집주(枣集酒)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녹읍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이라고 한다.

‘송하량액’을 생산하는 송하주업(宋河酒業)은 루이현 짜오지진에 본사를 두고 있는데, 저우커우시(周口市) 관할에 해당하는 이곳은 안후이성(安徽省)과의 경계와 맞닿아 있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노자는 조집주(枣集酒)를 마시고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명산대천을 유람하던 노자가 어느 날 청우(靑牛)를 타고 급히 녹읍으로 돌아왔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처참했다. 오랜 가뭄으로 곡식들이 다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자의 귀향을 알게 된 백성들이 길거리에 나와 땅바닥에 머리를 치며 도움을 청했다. 마음이 급해진 노자는 먼저 청우를 시켜 황하와 회하(淮河) 사이에 큰 도랑을 파게 했다. 그러나 이미 황하는 말라 있었다. 오직 우(禹) 임금이 목욕을 하고 신선이 됐다는 구룡정(九龍井)에만 물이 조금 남아 있었다. 노자가 항아리의 물을 우물에 들이붓자 바닥에서 맑은 물줄기가 솟구쳤으며 이어 강을 가득 채운 물이 마을 앞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금세 논밭에 오곡이 풍성해졌으며 이 물로 술을 빚자 그 맛이 감로수와 다를 바 없었다.

 

이후 사람들은 노자가 이 강을 보내주었다고 해서 ‘송하(送河)’라고 불렀다. 세월이 더 흐른 뒤, 송 태조(太祖)가 ‘送’과 ‘宋’이 발음이 같다고 하여 ‘송하(宋河)’로 고치게 했으며 이때부터 녹읍 사람들은 조집주(枣集酒)를 ‘송하주’라고 불렀다고 한다.

 

송하주는 춘추시대부터 있었으며 수·당 시대에 번성을 누렸다. 특히 서기 743년 당 현종이 직접 녹읍에 찾아와서 자신의 조상인 노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송하주를 쓴 일을 계기로 그 이름이 전국에 퍼져 나갔다.

 

다음 편은 여기에...

https://brunch.co.kr/@ahura/682


매거진의 이전글 왜 쓰촨 성에 명주산지가 몰려 있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