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이 아니면서도 '스스로' 왕이 된 최초의 남자
견고하기 그지없는 신분제도가 있는 사회였다.
'성골'이라고 하는 왕족이 아니고서는 왕이 될 수 없는 시대였다.
성골의 여자라 할지라도 왕이 되는 시대였다.
그렇게 성골의 마지막에 마지막 여자까지 여왕을 하고서 왕을 할 성골이 없어지자 화백회의가 열렸다.
사실 누구를 뽑을지 고민하거나 심각한 회의를 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그 회의가 열리기 수년 전부터 그가 왕이 되는 것은 외길 수순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 외길 수순을 오롯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적국인 고구려부터 왜(일본)과 당(중국)까지 활보하며
국내에 있었던 시간보다 해외에서 떠돈 시간이 많았던
그는 51세가 되어서야,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이 된다.
그의 삶은 지난하였다.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왕족인 성골의 대접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화랑이 되었지만, 그것은 귀족 자제로서의 한계를 가질 뿐, 왕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의 사위가 도독으로 있던 대야성이 백제의 공격으로 함락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위가 죽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백제의 칼에 죽음을 당했다.
김춘추가 딸을 잃은 아픔이 얼마나 극심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이 남아 있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나 역시 딸바보이긴 하지만, 내 딸이 누군가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수준의 아픔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 1000% 동의한다.
복수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 자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그의 위기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딸의 남편이었던 사위 김품석이 백제에 항복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알려지고, 당연히 그 정치적 타격은 김춘추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이대로라면 김춘추의 정치생명은 끝날 위기를 맞이한다.
신라의 독자적 힘으로 의자왕의 백제를 칠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위의 기록처럼 그는 눈물을 머금고 동맹군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행을 택한다.
백제를 칠 수 있는 군사를 달라고 당시 고구려왕이었던 보장왕을 찾아가는 도박을 한다.
든든한 아군이었던 김유신은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고구려를 짓밟겠다는 말로 그를 격려한다.
그렇게 그는 연개소문이 장악하고 있던 허수아비 왕 보장왕을 만난다.
보장왕을 통해, 실권자 연개소문은 제안한다.
한강유역의 땅을 내놓으면 협력해주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제안이었다.
안된다고 했다. 바로 감옥에 처넣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당장 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하여,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에게 청포 3백 보의 뇌물을 찔러 넣자, 선도애가 찾아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준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별주부전(토끼의 간) 이야기의 오리지널 스토리가 이때 나온다.
마침 그를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향하던 김유신의 과감함이 더해져 그는 '선덕여왕에게 한강 유역을 주자고 설득을 해보겠습니다.'라는 토끼의 기지를 살려 고구려를 빠져나온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유일하게 삼국 중 백제와 돈독한 관계였던 일본을 찾는다.
그가 일본까지 목숨을 걸고 배를 탔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기록에는 없다.
일본의 <일본 사기>에만 그 기록이 나온다.
왜 나라 조정에서 당나라 유학생 출신이자 관료였던 다카무코노 쿠로 마로(高向玄理)를 시켜 신라에 '인질'명분의 사신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춘추는 다시 직접 바다를 건너는 모험을 감행한다.
어떻게든 백제를 칠 수 있는 지원을 받아와야만 했다.
오가는데만 몇 개월, 이동기간에 체류기간까지 합쳐 1년여의 시간을 쓰고서도 그는 실패한다.
나름 큰 기대를 가지고, 준비를 했다고 했지만 실패한다.
그렇게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다시 당태종을 만나러 간다.
신라는 당나라의 힘을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고 당나라는 이미 여러 차례 고구려 공격을 실패한 전력이 있어 고구려 배후의 신라를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를 바탕으로 김춘추는 당나라 방문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지금처럼 비행기를 타고서 당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닌 장안(현재 서안)까지의 왕복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셋째 아들 김 문왕을 그곳에 남겨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로 남게 하여 나당 외교의 거점을 확보하는 한편, 아들을 통해 최강대국 당나라의 유력자들과 계속 교류할 수 있었으므로 신라 정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당태종과 만나서 마침내 원군 지원의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평양 이남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나당 동맹의 결성 시점으로 파악한다. 이것 역시 고구려에 생명을 담보로 해서 들었던 별주부전의 응용 버전으로 승화시키게 된다.
그렇게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뤄내는 밑바탕을 외교를 통해 이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딸이 다른 나라의 칼에 맞아 죽는 아픔을 보고서도 그 아픔을 잊기도 전에 해외로 떠돌며 복수의 칼을 가슴에 담았을 그가, 최초의 진골로서 왕이 되었을 때 결국 그는 행복했을까?
그의 최초의 목적이 왕이 되기 위한 것이었을까?
역사의 기록에는 상대등이었던 알천이 양보를 하여 김춘추가 만장일치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알천이 자신이 자격이 되는데도 그저 순순히 그에게 양보를 하는 착한 정치인이었을까?
나 역시 한국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자의 반 타의 반 다양한 나라에서 살아봤다.
같은 민족끼리도 이익에 따라 억울한 일을 당하기 일쑤인데,
남의 나라에 살면서 아무런 불편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내가 그들에게 뭔가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더럽고 치사하지만, 다양한 '외교적' 수단이 필요하다.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문화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태종 무열왕은,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그가 왕이 되기 이전 외교관으로 더 많은 활동을 하였고
동아시아 7세기 외교사를 논하는데 김춘추를 빼면 할 얘기가 없다.
그렇게 그는 딸을 잃고서도 해외를 떠돌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눈물을 바다와 사막에 흩뿌려야만 했다.
그것은 그가 왕이 되었다고 해서
보상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다.
그는 될 것이라 생각하고 적국 고구려에 뛰어들어가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바닷속 물고기 밥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에 왜에 가면서도
될 것이라 생각했으나
실패했으며
가장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던 당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기준으로는 이제 말년의 말년이라고
볼 수 있는 나이에
왕이 되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진골 출신으로
최초의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실패를 거듭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진했던 그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당신도 무언가가 되기 위해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이라는 것을 해봤을 것이다.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이
그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실패를 맛보게 되면
힘이 풀리고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물인가 싶어
자괴감에 몰려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주저앉아 신포도 타령을 하고 있는 순간
당신의 한계선은 뚜렷해지고 벽을 쌓게 된다.
바로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서
다시 웃음 지으며 달리라고는 하지 않겠다.
푹 쉬어라.
당신의 영혼을 따스하게 꼬옥 안아주어라.
그리고 너무 오래지 않은 시간
당신이 다시 일어서 달릴 수 있는
충전이 되었다고 생각할 즈음
분연히
일어서라.
여명 전의 어둠이 가장 짙다.
당신이 이미 거의 다 왔다는 사실을
당신만 모를 수 있다.
절대 지금 여기서
포기해서는 안된다.
일어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