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잘난 맛에 평생을 살았던 키 작은 거인, 나폴레옹이 1808년에 괴테를 만나고 남겼다는 그에 대한 평가이다. 이른바 고전용어로 '허여 하다'에 해당하는 이 평가는, 당대 최고의 영웅이며 천재로 칭송되던 나폴레옹이 그를 자신에 버금가는 인물로 인정한 것으로, 최상의 찬사라고 평해지고 있다.
그는 83년의 생애에 걸쳐 시와 소설, 희곡과 산문, 그리고 방대한 양의 서한을 남겼다. 문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철학과 과학 등 여러 분야에도 손을 댔고, 유능한 관료이며 탁월한 인격자로도 존경을 받았다. 그가 오늘날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인 인물인 까닭은 이처럼 길고 꾸준한 활동 기간과 다재다능함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그 시기 동안에는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나폴레옹의 대두 같은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런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그의 문학은 다른 여느 작가와는 다른 깊이와 넓이 모두를 성취했다.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자 세계문학사에 있어서 거인이라고 칭해지는 자,
바로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이다.
누구나가 알고 있는 그의 작품세계나 그가 얼마나 천재적이고 정력적이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그런 내용은 어디에서나 읽어봤을 테니까.
그는 좋게 말하면 평생을 사랑꾼으로 산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여자 없이는 살지 못하는 바람둥이였다.
어느 정도 심한가는 제목에 나온 것처럼 26살 연상의 여자와 연애를 한 것에서부터 74세에 19살 소녀에게 청혼을 하겠다고 난리를 치고, 의사에게까지 가서 확인 검진을 받을 정도였으니, 오죽하면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괴테의 연구는 괴테와 사귀었던 여자들과의 관계나 그 분석을 병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할 정도이다.
특히 그는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하였다. 그가 사랑이라는 것을 느낀 10대부터, 만났던 여인들은 작품에 자연스럽게 캐릭터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파우스트>의 그레트헨은 첫눈에 반한 첫사랑이었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저 유명한 샤를롯테 부프(1753~1828)는 그가 탐내서는(?) 안될 친구의 아내였다.
여성편력이 화려했던 것이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부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일생과 그의 성격을 감안하면 그는 여성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그의 섬세한 감성을, 그의 흔들거리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힘이 그를 83세까지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 또 다른 좌절을 맛보게 했다.
자신이 정력적으로 83세까지 작품 활동을 지속하는 동안, 사랑하는 이들을 먼저 보내야 하는 아픔을 고스란히 맛봐야만 했던 것이다.
크리스토퍼 람베르가 주연한 SF 걸작 영화 <하이랜더>를 보면, 판타지임에도 영원히 사는 자의 아픔을 서정적이며 현실적으로 매우 잘 묘사하고 있는데,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마니아층을 형성한 그래픽 노블이 원작인 <올드 가드>에서도 비슷한 감정에 대해 묘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명성과 부족하지 않는 경제적 지원을 갖춘 괴테의 입장에서 현실적인 고난이나 좌절이 뭐 있었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19살에 26살 연상인 아줌마와 연애를 하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18세기의 독일에서도 일반적일 리는 결코 없었다. 반대로 74세나 된 늙은이가 19살의 소녀에게 청혼하겠다고, 자신의 아들이 15살이나 어린 여자를 어머니라고 도저히 부를 수 없다고 반대해서 그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 사랑이, 그 당시에는 그만큼 절실하고 간절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감정들을 오롯이 작품에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여자를 밝힌 색마 수준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작품을 통해 구현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은,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이 기댈 유일하면서도 가장 편안한 안식처였던 것이다.
조금 범위를 과장하여 넓히자면 '사랑'이고 그 사랑이 그의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늘 그렇지만 또 그것이 전부를 해소해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여행'이라는 낭만적인 해소 방법을 찾는다.
1775년,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제2의 고향이 될 바이마르로 갔다. 이 작은 공화국의 신임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국정을 맡긴다. 성공적인 공직 수행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내면에서는 예술을 향한 갈증에서 비롯된 불안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써먹을 수는 없다.”
지적인 애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이나 당대의 지식인 헤르더와의 교제도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급기야 괴테는 바이마르 생활 10년 만에 도망치듯 혼자 여행을 떠난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 칼스 바트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3년여의 여행 동안 괴테는 이탈리아의 주요 명소를 돌아보고 한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느긋이 휴식을 취한 후, 1788년 여름에 바이마르로 돌아온다.
이때의 경험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괴테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본 수많은 고전 예술품의 미적 기준을 이상으로 삼은 특유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이 확립된 것은 물론이고, 이 여행을 통해 크게 변모된 괴테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한 옛 친구들과의 결별이 이어지며 긴 고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라고 모두 사이가 좋고 그의 천재성을 극찬하며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한때 그는 베토벤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각자 성격이 너무 정반대였기 때문인지 트러블도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산책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황족 및 귀족 몇 명이 걸어오자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의 베토벤은 저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고 이대로 뚫고 가자고 했으나, 괴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모자까지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이에 베토벤은 괴테가 너무 속물이고, 또 비굴하다며 큰 실망을 표했고, 괴테도 베토벤이 너무 교양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참 유치한 다툼인 것 같지만 두 사람이 얼마나 서로 달랐는지에 대한 사소하지만 지대한 차이의 증언이다.
대표적인 그의 소울메이트는 또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이었던 실러였다.
“자네는 내게 또다시 청춘을 안겨주고, 나를 또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네.”
그런데 1805년 실러가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그는 다시 큰 충격으로 실의에 빠진다. 이후 환갑이 되던 1809년부터 죽음이 이르는 83세까지 그는 평온한 삶 속에서 창작력을 다시 불태운다.
즉, 다시 그 좌절과 실의를 극복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 삶을 되찾아 온 것이다.
추측컨대, 그는 굉장히 예민하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보였을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매우 신경쓰일정도로 민감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성향의 예술가는 정말로 부대낌이 힘겹다.
단순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떤 식으로든 출구를 찾으려고 바둥거렸다.
사랑하고 자신을 이해하는 여인을 통한 것이 가장 본능적인 것이었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연상녀를 찾은 것과 너무도 노쇠한 나이에 젊은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