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하나로 억만장자에 오르기까지
일본이 대동아를 다 먹겠다고 전쟁을 벌이던 정점의 1943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다.
8남매 중에서 5번째였다.
그의 형제들은 당연히 아버지의 지도하에 의대에 차곡차곡 입학했고, 보장된 의사의 길을 선택했다.
그만 그 길을 가지 않겠다고 일본의 명문 사립대 주오대학 이공학부의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어린 시절 권투에 심취해 1964년 열린 도쿄 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기도 했다.
그의 본명은 쿠리하라 고로였다. 쿠리하라 가문의 다섯 번째 아이라는 뜻이다.
그런 '튀는' 기행을 일삼던 그의 삶이 결혼과 함께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다.
히로시마 지방 유지의 딸이었던 아내와 결혼한 후, 그는 야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가게 된다. 그 집안의 후계자란 의미에서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게 된다. 우리나라에선 매우 보기 힘든 사례이지만, 일본에서는 딸만 있는 집안이 데릴사위를 들인 후 사위에게 집안의 성을 주고 가문을 이어가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래서 그가 받게 된 새 이름.
야노 히로타케(矢野博丈, やの ひろたけ).
하지만 이름을 새로 받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문제는 자본.
장인에게 방어 양식장을 물려받았다.
결과적으로 사업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3년 만에 700만 엔에 이르는 엄청난 빚을 지고 빚쟁이들을 피해 야반도주하는 비참한 꼴을 맞게 된다.
이후 살아남기 위해 그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세일즈맨, 화장지 교환업, 볼링장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며 힘든 생활을 했다.
9번의 전직 후 1972년 약간의 종잣돈을 모은 그는
다양한 잡화를 이동하면서 판매하는 '야노 상점(矢野商店)'을 창업했다.
창업이라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현실은 초라하고 구차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선택한 사업은 도산했거나, 자금 사정이 어려운 기업의 재고품을 저렴하게 매입한 후 이를 전국을 돌아다니며 판매하는 것이었다. 즉, 현재 '지하철 행상'과 같은 길을 걸었던 것이다.
여기에 화재라는 악재까지 일어나 그의 사업을 더욱 힘들게 했다.
힘들게 구매한 제품들이 불타버린 충격으로 그의 아내는 쓰러지기까지 한다.
결국 야노 사장은 홀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행상인을 하게 됐다.
상품 진열 및 정리, 보충, 회계까지 모두 혼자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희망찬 미래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 고된 하루하루가 쌓여가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모든 업무 정리를 하는 것도 다 귀찮았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모든 제품의 가격을 원가와 관계없이 100엔(한국돈으로 천 원)으로 매긴 후,
그대로 판매하겠다고 나섰다.
백화점, 대형마트, 편의점에 이어 4번째 슈퍼마켓으로 평가받는 100엔 샵은 이렇게 탄생했다.
일일이 가격을 부치는 게 귀찮고 너무 힘들다는 아이디어 아닌 고충에서 태어난 것이다.
지금이야 성공하고 억만장자가 되었으니, 위에 적은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 '100엔 샵'은 온전히 야노 회장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1970년대 이미 모든 제품의 가격을 하나로 통일하고 이를 판매하러 다니는 행상인들은 이미 그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차이라면, 야노 회장은 단지 이를 '100엔'이라는 파격적인 저렴한 가격에 책정했던 것뿐이다.
1970년대 후반 오일쇼크 등의 문제로 제품 원가가 상승하자 '균일가 행상'은 자취를 감췄다. 자신이 그 입장이었기에 그 상황이 안타까웠던 야노 회장은 행상인끼리 모여 다니며 특정 장소를 하루 정도 임대해 판매를 진행하고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이러한 친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1977년 야노 상점의 이름을 '다이소 산업(大創産業)'으로 변경하고 법인화를 추진했다. 비록 회사 규모는 작지만, 물건만큼은 크게 다루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었다.
우리가 지금 한국에서도 길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만나는 '다이소'는 이렇게 아주 '우습게' 기업이 된다.
주요 판매 장소는 슈퍼마켓의 주차장이었다.
주차장을 보유한 슈퍼마켓들에게 부탁해 장소를 임대한 후 100엔짜리 제품을 판매했다.
슈퍼마켓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100엔짜리 저가 상품이 미끼상품이 되어 손님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고 야노 회장과 다이소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쉽게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설명했지만,
야노 회장은 100엔 샵이 단순히 미끼상품에 그치게 놔둘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100엔 샵의 상품 원가는 개당 70엔 이하였기 때문에 품질에 한계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일본 주부들은 100엔 샵 상품은 싸서 좋지만,
싼 맛에 쓰는 비지떡에 불과하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시장 평을 파악하고 분석한 야노 회장은 구매 스타일을 바로 변경했다.
제품 매입가를 98엔까지 올려 100엔으로 가능한 최대 품질의 상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슈퍼마켓의 주차장을 빌려 대규모 세일즈를 시작한 후,
일부 제품을 100엔 이상으로 매입해 더 낮은 가격인 100엔에 판매하기도 했다.
가격은 저렴해도 품질마저 저렴해서는 안된다는 야노 회장의 비즈니스 전략은 적중했다.
덕분에 다이소의 제품은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를 새롭게 받게 됐다.
야노 회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행상인의 제품은 A/S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는 고객들의 불만을 해결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고객이 다이소를 통해 판매된 제품에 즉시 클레임을 걸고
판매자에게 연락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덕분에 고객들의 신뢰가 증가했고,
이는 다이소가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통기업 '다이에'의 나카우치 이사오 사장이
장소 대여를 중단하겠다며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야노 사장과 다이소 사업은 다시 한번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매장이 더러워지기 때문에 장소 임대를 중단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100엔짜리 미끼상품이었던
다이소의 매출이 늘어나면서 정작 소비자들이 슈퍼마켓의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렇게 슈퍼마켓이 다이소를 거부하는 것을 본 야노 사장은
결국 행상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매장을 차리는 수밖에
타계책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렇게 1991년 최초의 다이소 매장이 설립됐다.
그런데 위치가 문제였다.
시코쿠섬 다카마쓰 시가 1호 매장이었던 것이다.
자본이 부족했던 야노 사장은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에 첫 번째 매장을 내야만 했다.
그런데 늘 천운이 없다고, 고생만 하던 그에게
단 한 번의 동아줄이 떨어진다.
'버블경제'
1980년대 일본의 거품 경제가 꺼지고 1990년 초부터
10년이 넘는 장기 침체에 빠지는 불황이 시작된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았다.
많은 백화점과 슈퍼마켓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러한 경제 분위기는
100엔 샵에겐 역전의 계기를 마련해주는 동아줄로 작용하게 된다.
소비자들은 100엔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가성비 높은 제품을 판매하는 다이소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다이소의 매출은 수직 상승했다.
5000만 엔에 불과했던 자본금은 27억 엔으로 급증했고,
2000년에는 일본 '벤처 오브 더 이어'를 수상했다.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쿠라뽕 이야기를 하냐고
딴지를 거는 어리석은 이가 없길 바란다.
그가 일본인이고 일본기업주라는 사실은
이 이야기의 핵심이 아니다. 그 사람들 물건 사자는 게 아니란 뜻이다.
위의 이야기 흐름을 그저 따라오게 되면
그가 어려움을 딛고 자수성가한
훌륭한 사업가라고
오독할 수도 있겠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정확하게 맞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는 없는 집안에서
없이 자란 사람도 아니었고
심지어 처가의 데릴사위로
성과 이름까지 받아가며
돈 있는 처가를 둔 사람이었다.
최근 비지니스계의 추세가 그렇다.
가만히 살펴보면
개천용은 점점 줄어간다.
그의 사례를 꼼꼼하게 살펴보길
다시 한번 요청한다.
그는 여러 가지를 시도할 수 있는 여건이었고
그만큼 공부하고 경험치를 쌓은 자였다.
고기도 먹어본 자가 먹는다고 했다.
명품 브랜드를 성공시킨 자들 중에
극빈자는 없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업실패로 인한 야반도주,
별의별 직업을 전전하며 9번이나 전직,
심지어 화재사고로 인한 멘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자신의 경험으로
승화시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전에 다른 인물을 논평하며 적긴 했지만
다시 한번 강조한다.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실패라는 것이
그리고 당신이 지금 뭐하고 사는지
한탄하며 하고 있는 그 일이
아무 의미 없는 소용없는 짓이라고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당신이 이후에
무엇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당신이 이제까지 해왔던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당신의 미래에 사용될
아주 귀중한 재료이며
경험치이다.
그것이 성공의 경험이 아닌,
실패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 분함과 섭섭함을
만회하기 위해
보다 많은 신중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에 그렇다.
당신이 아직 그것이 어떻게 사용될지 모른다고 하여
그 실패들에 대한 가치를 평가 절하하지 마라.
당신의 삶의 궤적
그 어느 하나 버릴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