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6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을 스밀리안(오늘날 크로아티아 지역에 해당)에서 태어났다. 정교회의 성직자였던 아버지는 아들도 성직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었음에도
가재도구나 농사도구를 직접 발명해서 쓸 정도로
탁월한 발명의 재능이 있었다.
그러한 어머니의 곁에서 자란 그는 다섯 살 때
이미 나름의 발명을 시작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가 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삶과 업적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인정할만한
금세기 과학을 100년 앞당겼다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그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전기공학과 무선통신 관련 전공자들이 거의 모든 단계에 걸쳐 나온다는그 이름, 바로 천재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이다.
테슬라는 1875년에 그라츠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람 다이너모라는 직류 기계장치를 보았다. 그것에 빠진 그는 직류 대신 교류로 작동하는 장치를 구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보장받았던 장학금이 중지되면서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없어 제적당한다.체코 프라하 대학으로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옮겼지만 다시 장학금이 막히면서 제적당한다.공식적으로 그는 대학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그렇게 그는 계속 연구만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친구의 추천장과 자신이 쓴 몇 편의 시를 움켜쥐고 돈도 없이 미국으로 온다. 그리고 '발명왕' 에디슨 컴퍼니에 취직하게 된다.
직류 마니아였던 토마스 에디슨과 대립, 회사를 뛰쳐나와 투자자를 긁어모아 자기 회사를 세운다.
그의 교류 전기에 대한 실험이 성공을 거두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많은 투자자들이 몰렸고, 거금의 투자와 특허비 지급을 약속한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에디슨과는 평생 척을 지게 된다.
테슬라와 에디슨
일반인들에게 발명왕으로 알려진 에디슨은 탁월한 정치적 능력을 갖춘 수완가였다.
테슬라가 꼴통에 비사교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려졌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부드러운 언변으로 연설을 잘했다고 한다.
머리도 좋아 8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의 천재에다 188cm의 장신에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사교계 스타였다.
다만, 에디슨과 다른 점이었다면, 그에게는 오로지 한 목적만 있었다.
본인의 연구.
그는 자신의 사교계 진출도 연구를 위한 인맥 쌓기의 일환으로 여겼다.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하는데 86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독신이었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사치라고 말하며 연구만에 올인했다.
그렇다면 그가 한 평생을 바쳐 무슨 대단한 발명과 연구를 했느냐고,왜 에디슨은 그렇게 유명한데 그는 그 빛에 가려져 있었느냐고 물을 수 있다.
자기장의 단위로 그의 이름인 테슬라(T)를 사용한다. 그가 죽은 지 30년 후(1975년)에야 미국 전기전자 학회(IEEE)가 그를 기리는 IEEE Nikola Tesla Award를 제정하면서 다시금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 · 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 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사실 직류 교류 전쟁에서 일방적으로 승리한 것은 테슬라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돈방석에 앉지 못했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 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기가 막힌 것은, 이 형광등마저도, 결국 제품화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전 세계에 형광등을 보급하여 떼돈을 번 회사는 바로 최대의 라이벌 에디슨이 만든 GE 사였다.
에디슨이 장사꾼이었다면 테슬라는, 말 그대로, 발명왕이었다.무려 25개국에서 272개 특허를 획득하였으니 그 규모와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이 나아갈 방향을 알려준 인물이었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 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 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 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 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대가들의 실패에 대해 말하는 이 공간에,
새삼스레 그에 대한 재평가를 펼쳐놓으려고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 도대체 무엇이 실패였는지 이해가 안 가는 이들도 있을 수 있겠다.
실패는 많았다.
돈 때문에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제대로 지원받지 못해 원하던 대형 발명 프로젝트를 끝마치지 못해
분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중간 결과물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렸다.
지난한 삶과 그 고난도 고난이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도 비참하고 서글펐다.
80이 넘은 그는 호텔방과 임대주택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가난한 삶을 살다가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식사하기 전에 청결벽이 심해 18장의 냅킨으로 자신이 쓸 식기를 닦아서 썼으며,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천재의 생각과 행동을 범인들이 이해하는 것은
그 자체가 무리다.하지만, 천재는 알아봐 주는 이가 있을 때만이더더욱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천재적인 아이디어와 연애가 사치라며오롯이 자신의 연구에만 집중했던그의 삶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설사 일인자로 인정받지 않더라도 대외적으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않았어도 그는 묵묵히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했고 성과를 냈다.
그에 대한 자료나 기록이 많지 않아언론플레이에 능한 에디슨의 안티 노이즈 마케팅 공격에 점철된 것이 많았을 것이라는 추정이 많다.
물론 그는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알아봐 주는,돌봐주는그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던, 그의 어머니가 좀 더 그와 오래 함께 할 수 있었다면그의 삶이 조금 더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숱하게 노력하고서도, 지원을 중단당해도 그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돈 때문에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다양한 연구 성과를 짧은 시간 내에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