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발검무적 Apr 04. 2022

사람들에게는 '바보 의사'라고 불렸지만...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국의 슈바이처'로 기억되다.

200번째 대가의 이야기.

오른쪽 안경낀 사람이 18세의 장기려 박사.

1911년 평안북도 용천(龍川)에서 장윤섭과 최윤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4월 부친이 설립한 의성 학교에 입학했고 개성의 감리교 학교인 송도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32년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의 조수로 입국하여 한국 외과계의 권위자 백인제(白麟濟) 교수의 제자가 되어 경성의전 외과의 조수로 근무했고, 이후 강사로 1940년까지 재직했다. 1932년 내과의사인 김하식의 맏딸 김봉숙과 결혼하고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뒤에 오른쪽이 장기려 박사.

1937년 후복막 봉과직염으로 패혈증을 일으켜 사망한 유상규의 시체를 해부한 일이 계기가 되어, 패혈증을 일으켜 사망한 환자들의 7가지 사례를 더 연구하여 《일본 외과 학회지》에 <후복막 봉과직염(後腹膜蜂窠織炎)>을 게재했다. 1938년 경성의전 외과학 강사로 근무하다가 경성의전 입학 당시 돈이 없어서 의사의 진료를 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던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1940년 기독교 계열의 평양 기휼병원 외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40년 9월 20일 <충수염 및 충수염성 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로 일본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 취득 후 세브란스의전 이용설의 추천을 받아 평양 연합 기독병원 외과로 부임하였다가 곧 외과 과장직을 맡았다. 그는 1942년 4월에 일본 외과학회에 <근염의 조직학적 소견>이란 논문을 발표했고, 1943년에는 간암 환자에 대한 설상 절제 수술에 성공해 그 결과를 《조선의학회잡지》에 실었다.


해방 이후 그는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생과장을 맡았으며, 평남 제1인민병원(도립 평양 의원)의 원장 겸 외과 과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에는 평양의대(김일성대 의과대학 전신) 의학부 외과학 강좌장을 맡는 한편 김일성 주석 주치의가 되어 북한 당국으로부터 모범일꾼상을 수여받았다.


1948년 여름, 그는 북한에서 주는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49년 3회에 걸쳐 《인민 보건》에 <아.베.비위네브스키교수의 <노보카인불로카-트>와 유성 방부제의 상응증 및 사용법에 관한 이론 및 실증>을 실었다. 한편, 그는 1949년 북조선보건련맹 제5차 중앙대회에서 최응석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의사. 부산 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설립자 겸 초대 원장, 제2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병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한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성산(聖山)인 장기려(張起呂)의 이야기이다.


그가 세운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1977년 의무의료보험이 출현하기 이전 임의가입 의료보험의 체제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이며, 이는 이후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 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 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남에서는 물론이고 특히 북에서의 지위도 상당히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그에게는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까지 허락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아끼던 북한 최고 외과의사의 운명은 한국전쟁과 함께 소용돌이쳤다. 평양의대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던 장기려는 1950년 말 평양을 수복한 국군과 유엔군에게 붙잡혀 국군 야전병원에서 국군 치료를 맡았다. 장기려는 후퇴하는 국군 호송차량에 타기 전 집에 전화해 옷가지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당시 평양에는 장기려의 부인과 자녀 5명이 살고 있었다.

그때 옷을 챙겨 온 이가 둘째 아들 장가용(현 인제대 의대 장여구 교수의 부친)이었다. 혼란 속에 국군 호송차는 부자를 싣고 남쪽으로 달렸다. 결국 이런 사정으로 북한은 장기려가 국군에 납치됐다며 송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남으로 내려온 그는 부산 제3육군병원에 머물며 진료했다. 이듬해인 1951년 10월, 목사 한상동, 전영창 등과 함께 부산 영도의 교회 창고를 빌려, 영양실조와 전염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을 위해 ‘복음 진료소’란 이름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했다. 유엔에서 대형 천막 세 개를 장기려에게 지원했다.


‘천막병원’에 각각 진료실·수술실·입원실을 꾸몄다. 그는 이 천막병원에서 무려 6년 동안 매일 100여 명이 넘는 환자를 무료로 치료했다. 이때 서울대 의대 교수로 부산에 와 있던 전종휘 박사가 진료를 도왔다. 1952년 4월부터 부산에 있던 서울대 의대에 외래교수를 맡았으며, 이후 서울대 의대 외과 교수로 부임하여 복음병원 진료와 강의를 병행했다.

부산 시민들은 전쟁 내내 무료로 진료해준 장기려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신뢰를 담아 병원 건립 모금운동을 펼쳤다. 1956년 10월 천막을 걷고 새 건물을 세워 현대식 대형 병원인 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신축했다. 장기려는 환자들만이 아니라 병원 직원에게도 인정을 베풀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역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의사가 된 그의 친손자 장여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어른들에게 들었던 대로 설명한다.


“병원 직원은 가족 수대로 월급을 가져갔다. 앰뷸런스를 운전하던 송 기사님 가족이 10명이라 가장 월급이 많았고, 그다음으로 할아버지 의형제였던 전종인 교수님도 자녀가 많아서 두 번째였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랑 두 식구라서 월급을 적게 받으셨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는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되어있다. 오히려 자신이 의술을 펼치며 도왔던 남측에서 홀대를 받는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장기려 가족을 상시 감시했다. 북한의 납치에 대비한 보호 명목이었다.


북측에서는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남측에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월남자 가족은 동요 계층, 심지어 적대계층에 편입되어서 수모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례적인 사례로 꼽히는데 그가 북에 있으면서 베풀었던 의술에 은덕을 입은 사람들의 보은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해석되는 부분이다.

북한에서 장기려의 가족은 ‘특별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큰아들은 인민군에서 의무장교로 상장까지 지냈고, 큰딸은 식료품 공장 총지배인, 작은딸은 평양 암연구소 연구원, 셋째 아들은 평양의대 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북한에 남아 있는 그의 손자 21명 중 중 15명이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된 바 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장기려는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산가족 상봉의 꿈을 끝내 못 이뤘다. 대신 그는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여보, 몇 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 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후에 한국 최초의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도 그의 제자였는데, 1950년대만 해도 사람들이 부검에 대해,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며 굉장히 안 좋은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런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 때 불같이 혼을 내 정신을 차리게 한 것도 바로 스승 장기려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쭉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 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 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의를 따기 위해 공부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실 이미 전문가였던 그가 그런 시험으로 자격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기도 했다.


장기려는 1956년에 서울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0월 부산대 의대 교수로 취임하여 외과를 창설했다. 그는 1961년까지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재직했고, 1963년에는 가톨릭대 의대 교수로 부임하여 1973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1961년 대한 외과학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장기려는 1968년에는 부산복음간호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이 학교가 전문대학으로 승격한 뒤에는 1979년까지 학장을 맡았다. 1969년에는 김희규, 윤덕선, 홍필훈 교수 등과 함께 <외과학>이라는 우리말 교과서를 집필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1974년에는 부산에서 한국 간 연구회가 창립되었고 장기려가 초대 회장을 맡았다. 한국 간 연구회는 장기려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간 및 담도 외과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모임은 1982년 부산 간 연구회로 개칭되었다.


장기려의 가장 중요한 연구업적으로는 간 연구를 들 수 있다. 1959년 2월 24일 부산대 의대 장기려 교수팀은 한국 최초로 간암 환자에 대해 대량 간 절제술에 성공했다. 이들은 간암, 담관암, 임파 육종 등 8가지 사례의 간엽 절제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여 간엽 절제술이 결코 위험한 수술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를 계기로 점차 간절제술, 문맥압항진증에 대한 혈관문합술 및 대혈관에 대한 수술 조작 등이 가능해지면서 간장 외과의 발전이 급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 같은 해 6월 대한의학협회 학술대회에서 이 성과를 발표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61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한편, 장기려는 1960년 10월 대한의학협회 학술대회에서 유성연(부산대 의대 외과학교실)과 함께 <한인 간내 혈관 및 담관계의 형태학적 연구>를 발표했다. 이는 한인 사체 140개로부터 Vinylite-acetone을 간내 혈관과 담관계에 주입하여 vinylite-tree를 작성하고, 그 주형 표본에 의거하여 입체적으로 문맥을 중심으로 간동맥, 담관계 및 간정맥의 주행 방향, 분지부, 분지수, 분지 형식 및 분지 상태, 국소적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나아가 외과적인 간구역을 설정함으로써 간장외과에 필요한 초석을 이루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에게는 스승 백인제 교수의 뜻을 거절한 데 대한 후회가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백인제 교수가 주선한 대전병원 외과과장을 거절하고 평양으로 떠난 뒤 장기려는 스승이 6·25 때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속죄의 뜻으로 부산에 스승 이름을 딴 대학병원(인제대학 백병원) 설립허가를 위해 적극 나섰다.


부산에 고신대병원과 인제백병원이 나란히 들어서게 된 사연도 거기서 비롯된다. 1979년 장기려는 고신대학 병원과 인제대학 백병원을 동시에 설립허가 해달라고 문교부에 서류를 제출했다. 두 병원 모두 주도적인 설립 추진자로 본인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결국 문교부에서 2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설립허가를 내주게 되면서 그는 소원을 풀게 된다.


장기려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으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의 설립을 들 수 있다. ‘부산모임’의 참가자인 채규철이 자신의 덴마크 유학시절 병이 났을 때 무료로 치료받은 경험을 털어놓으면서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할 것을 제안한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장기려 역시 이북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체험하고 온 터라 월남 후에도 항상 의료혜택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애초 이러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던 복음병원이 확장,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초의 무료병원 성격이 변하여 새 길을 찾고 있던 장기려는 이들과 의료 협동조합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로써 1968년에 ‘부산모임’ 회원들과 부산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초량 복음병원 분원에 모여 부산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이 발족되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생활 여유가 없는 사람들 또는 조금 큰 직장이나 공무원이 못 되어서 의료보험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건강할 때 조금씩 돈을 내어 환자들을 돕다가 자기와 자기 가족이 병들었을 때 극히 적은 돈으로 치료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교회 조직의 협조로 조합원 700여 명을 확보했는데, 1인당 월회비는 60원 수준이었다.


1969년 4월에 스웨덴 아동보호재단(SSCF)의 협조로 이들의 원조를 받던 1만 3천 명을 일시에 조합에 가입시킴으로써 규모가 확장되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다른 지역으로 점차 확장되어 1972년 부산에 1만 3천여 명, 서울에 1천5백여 명의 조합원이 있었으며 가입 조합원 1인당 보험료는 부산에서는 월 120원, 서울에서는 300원이었다. 조합원들은 매년 무료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고, 입원 시 보증금 없이 지정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본인부담금은 20%였다.

조합은 1975년 8월부터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다가, 다음 해에는 의료보험법에 의한 특수법인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가 설립되었다.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정부의 의료보험 실시보다 10년 정도 앞선 것이었다.


1975년 부산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이 설립되었을 때 장기려는 원장을 맡아 1983년까지 이끌었고, 1976-93년에는 부산 아동병원 원장 겸 이사장으로도 재직했다. 1969년에는 부산에서 간질환자회 창립을 주도했고 부산 아동병원 거제도 애광원, 거제도 보건원의 자문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인제대 의대 부산백병원의 명예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992년 뇌졸중으로 3년간 투병한 그는 1995년 서울 백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84세였다.

장기려는 일평생 다양한 사회 봉사 활동에 참여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1975년에는 부산시로부터 제1회 선한 시민상을 받았고, 1976년 4월 대통령 국민훈장 동백상을 수상했다. 1978년 4월에는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인도상을 받았고, 1978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1991년 제1회 호암상 사회봉사부문에 선정되었고, 1992년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받았으며, 1995년 제4회 인도주의 실천 의사상을 수상하며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1996년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고, 2005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헌정 대상자로 선정했다.




아버지가 학교까지 세웠던 설립자에, 지금의 서울대 의대 수석졸업에 시대를 막론하고 의사의 삶을 살았는데 그에게 어떤 실패와 좌절이 있었느냐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위에 서술한 것이 대략적인 그의 삶이었다면 이제 그의 삶에 있는 주름 속의 이면들을 조금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사실 그는 의사가 되려는 마음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사로서 평생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력도 모자라고 학비도 문제여서 포기했고, 공학자로서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에 여순 공과대학에 진학하려고도 했는데 예과 시험에서 탈락해버린다.


게다가 당시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당시 조선에서 학비가 가장 적게 드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로 진학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도 있었는데, 사립학교이다 보니 당시 한 해 학비가 경성의전이 35원에 세브란스의전이 100원으로 세 곱절 정도여서 포기하였다, 원래 성적이 부족한 그였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나서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1928년 4월 1일 경성의전에 31등으로 입학한 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석 졸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격동의 세월을 살아서였는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살았어야 해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워낙 눈물이 많았고 정 많은 성격이었고 한다. 지나가다가 본 걸인에게 적선을 하려 하였으나 현금이 없어, 한 달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몽땅 그대로 주었다가 그 걸인이 수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해 지불하기도 했고, 당장 돈이 없지만 농사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농부 환자에게 병원이 반대하여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을 열어줄 테니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의 일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제안한 특별 상봉을 거절한 것이다. 평생을 아내와 남겨두고 온 자식들을 그리워했던 그는 재혼하지 않고 서민들을 위해 진료에만 전념했다. 북측에서 그가 죽기 2년 전까지도 송환을 요구했을 정도로 북에서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그간의 업적만으로도 특별상봉의 특혜를 받고도 남을 자격이 있던 그였다.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렇게 찾아왔지만,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며 그는 거절의 의사를 표명한다. 당시 북에서는 남한이 장기려를 납치해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장기려가 북에 가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북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비난을 우려했던 정부는 거의 반강제로 장기려를 북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분노한 장기려가 “오냐, 그럼 가주겠는데 대신에 북에 가면 안 돌아올 거다.”라고 엄포를 놓자 경악하여 보내지 않았다는 뒷얘기가 무성했다. 그만큼 그는 원칙과 형평성에서 자신만이 특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던 이였다.

이후 어머니를 만나게 된 서울대 의대교수인 둘째 아들

그렇다면 그가 가족을 그리는 마음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덤덤했는가? 아니다.


어느 날 장기려가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고 의사를 사람들에게 누누이 비쳤다. 평소에 사치라곤 일절 모르던 장기려가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를 얼마나 가고 싶으면 저러시나 싶어서 어디를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는데 장기려는 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이자 적성국인 동독엔 왜 가고 싶냐고 묻자 장기려는 내 아들 학용이(큰아들)가 거기 있다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북에서 의사가 된 장기려의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동베를린에 열린 사회주의권의 의학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소식을 나중에 접하게 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기려가 어차피 이미 지난 학회이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이라도 밟아보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그만큼 혈육을 보고 싶어 간절한 마음이었던 그가 특별상봉을 거절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도저히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마지막으로, 정착 의사인 그가 어디에 살았는지 당신은 반드시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채 가지지 못하고 병원 옥상 사택(이라고 읽고 옥탑방이라고 쓴다)에서 살다가 1995년 12월 추운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날 새벽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신이라면 서울대 의대 출신에 한국의 저명한 의사들은 모두 그의 제자들에, 부산대 의대병원장까지 지냈던 인물이라면 집 한 채 없이 자신의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이 망가져 힘겨운 상황에서도 내년에 죽을지 몰라 급한 마음에 왕진 왔다면서 가난한 이들을 왕진하겠다고 산동네를 다닐 수 있었겠는가?


전쟁통이라고는 하지만 눈에 밟히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겨우 둘째 아들 한 명을 데리고 나와 홀아비로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그에게 얼마나 많은 고초와 장애와 서러움이 쌓여 있을까? 일제 강점기의 의사라고 하는 이들이 이후 얼마나 많은 치부(致富)를 했는지는 지금의 의사라고 하는 작자들이 자기 자식들의 교육을 핑계로 강남에 부동산 투기를 하며 눌러앉아 있는지를 보면 안다.

내가 오늘 실패한 대가들의 인생 이야기에 200번째 주인공으로 그를 선택한 것은 이전에도 그렇고 이후에도 그렇고 작금의 현실에서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런 인물이 없다는 서글픔과 이런 훌륭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을 가진 이의 유지를 제대로 받드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경종을 울려주기 위함이다.


과연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정상인가? 저마다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언제든 남을 해하고, 심지어는 공무원이라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어 자기 조직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서로 봐주고 챙겨주며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사회를 바로잡는 것에는 아무런 사명감도 없는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개념이라고는 집에 두고 다니려야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작자들에게 장기려의 삶은 그야말로 ‘바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바보스러움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살렸고, 많은 이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였으며 사회를 그나마 고쳐나갔는지 아는 이들은 모두 안다. 지금 슈바이처는 알면서 정작 그의 이름이 생소하고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딱한 당신들에게 장기려 같은 이가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당당히 소개한다.

병원 옥상 옥탑방에서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눈을 감았을 그의 거룩한 삶에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강남에 아파트 사서 외제차 굴리며 사는 의사만 부러워할 줄 알았지, 정말 없이 살고 힘겨웠던 이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며 평생을 살아온 의사의 삶을 왜 부러워하지 않는지 차분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 사람이 없었음에 고작 작은 실패에 좌절하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건방 떨지 말고 그저 숙연히 앞으로 당신의 사람을 얼마나 더 나은 삶으로 이끌지 그리고 그것으로 어떻게 사회를 더 올바른 길로 바로잡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00명째 윤동주를 소개했던 것이 며칠 전인 것 같은데 벌써 200명째가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대가들의 이야기를 클릭하며 함께 공감해주고 응원해주신 구독자 여러분이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오늘입니다.


단행본 분량으로 벌써 14권이 조금 넘어가는 분량을 채웠습니다.


당신의 힘겨운 삶에,


왜 이렇게 되는 일도 없고 나만 실패하는 것 같고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속상하고 억울하고 도저히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마음에 따스한 말 한마디가 아닌 더 따끔한 회초리를 들었던 것은 당신이 분연히 일어나 그쯤의 실패 따위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어서였습니다.


아직 당신이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있기에, 그날들이 화사하기 위한 잠시의 먹구름이고 비구름이며 소나기라는 것을 꼬옥 일러주고 싶었습니다.


나보다 앞서 산 그 수많은 대가들도 그런 일이 있었고, 그렇게 일어섰고, 그렇게 대가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그 대열에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함부로 선을 긋지 마세요.


당신은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응원합니다, 더욱 가열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집을 나왔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