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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Apr 05. 2022

가정폭력에, 학교폭력에, 마약중독자 엄마에 아내까지..

그 모든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백인 래퍼로 인정받다.

201번째 대가의 이야기.


1972년 어머니 데비 넬슨과 그녀가 살던 동네의 밴드에서 활동하던 멤버 아버지 마셜 브루스 매더스 2세(주니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2019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해 그는 태어나 이후 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자기가 병원에서 다른 아기들과 바꿔치기당한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고, 유명해진 아들의 공연장에 아버지가 찾아왔고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으나 그가 만나기를 거부하였다. 


거부한 이유는 그가 생후 6개월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렸으니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 당당히 밝혔다. 그를 키워준 할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유아 시절의 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내내 아버지에게 주겠다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아들이 유명해지자, 그의 아버지는 자신은 가족을 버린 적이 없다며 다른 주장을 내놓았다.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다는 말은 부인이자 그의 모친인 데비 넬슨의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재혼을 한 아버지가 자신의 딸에게 전해서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는데, 편지 내용은 본인은 그를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니고 원래 그가 태어났을 때 병원 측에서 아버지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했고 그 뒤에도 아버지는 일이 바빠 자주 찾아보지 못했는데, 전처인 그의 모친이 이를 갖고 이간질을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히려 어느 날 집에 와보니 부인인 데비가 아들을 데리고 말도 없이 사라졌고 자신은 가족을 한참 찾아 헤매다 결국 포기하고 결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하였다고 하였다. 물론 당시 그의 어머니가 보인 행동들을 종합해보면 상당한 설득력이 있으나, 정작 2019년에 그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2020년 그가 발매한 앨범 <Music To Be Murdered By>의 수록곡 ‘Leaving Heaven’에서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 느낌도 없다며 계속 디스 하는 것으로 유년시절의 상처에 대해 그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5살 때 디트로이트로 이사하게 된 그는 줄곧 우울증과 약물중독에 시달리던 어머니 데비 넬슨에게 학대를 당했고, 그런 영향으로 ‘My Name Is’, ‘Kill You’, ‘Without Me’, ‘Cleanin' Out My Closet’ 등의 곡을 통해 어머니를 디스하고 욕하는 가사를 썼다.


잦은 이사로 인한 전학과 왜소한 체구, 멍 때리며 언제나 랩의 가사를 중얼거리는 그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학교에서도 왕따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대표적 사건으로 그가 10살이던 1981년 10월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중 학교 일진에게 폭행당해 9일간이나 코마 상태에 빠졌던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를 피해 친척들과 자주 붙어 지내던 그는 힙합 마니아였던 그의 외삼촌, 로니 넬슨을 유일한 친구 삼아 지내게 되었다. 이후 MMLP2의 ‘Legacy’에서도 자신이 당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미국 디트로이트 출신의 힙합 MC로 흑인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힙합 음악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전설의 위치에 오른 백인 힙합 아티스트이며, 1990년대 힙합의 황금기 골든 에라의 말엽에 혜성처럼 등장해 2000년대를 말 그대로 점령한, 힙합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우리에게는 에미넴(Eminem)이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본명, 마셜 브루스 매더스 3세(Marshall Bruce Mathers III)의 이야기이다.


에미넴은 힙합이라는 장르뿐만 아니라 미국 대중문화에서 엄청난 인기와 대중성을 자랑한다. 장르를 불문하고 2000년대 이후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가수이기도 하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힙합 아티스트이며, 또한 21세기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롱런에 성공한 음악가 중 하나를 꼽을 때 반드시 언급된다. 현재 나이가 50이 훌쩍 넘었지만, 데뷔한 지는 20년 이상, 활동 자체를 본격적으로 한 지는 거의 3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싱글이나 앨범이 발매될 때마다 전 세계 음원 시장 차트 상위권을 기록한다.


한마디로 현 힙합씬과 대중음악 메인스트림의 맏형이자 살아있는 레전드 그 자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다. 전성기가 훨씬 지난 이후에도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파급력을 전달하고, 음악 장르에 존재하는 인종의 벽을 부쉈다는 점이 같아서 에미넴을 힙합계의 엘비스 프레슬리, 21세기의 마이클 잭슨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꾼 기질이 있어서 맨 처음엔 만화가를 꿈꿨지만 11살쯤 됐을 무렵, 외삼촌 로니가 아이스 T의 음반을 선물해 주었고, 같은 백인으로 힙합 그룹이었던 비스티 보이즈의 음반 등을 듣게 되면서 백인도 랩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로니 삼촌의 비트박스에 맞춰 어설프게 랩을 해 테이프에 녹음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랩에 몰두하기 시작해, 13살 무렵에는 자신의 이름인 마셜 매더스의 약자(M&M)에서 ‘에미넴’을 예명으로 짓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점심시간에 랩 배틀을 벌이고 자신의 힙합 그룹을 결성하기도 하며 음악에 몰두하다 학교를 결석한 적도 있었다. 마침내 17세, 고등학교 때 학교를 자퇴하고 본격적인 래퍼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때 이미 힙합을 때려치운 삼촌 로니는 에미넴이 래퍼로 성공하고 싶다는 꿈을 얘기했을 때 ‘허망한 꿈일 뿐이니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현실의 벽을 알려준다.


89년부터 같은 백인 래퍼인 카오스 키드와 만나 ‘Bassmint Productions’라는 그룹을 결성해 음악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흑인들 앞에서 공연하면서 ‘Nigga(깜둥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야유만 잔뜩 들으며 흑역사를 남긴다. 


당시 녹음들을 들어보면, 가사나 스킬 등이 상당히 조잡하고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의 에미넴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노력을 해서 환골탈태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 정도이다. ‘Bassmint Productions’는 이후 그룹 이름을 ‘Soul Intent’로 바꾸고 나서 계속 활동하다가 1995년에 해체된다.


언더에서의 삶은 비난과 야유의 연속과 반복이었다. 그는 자신의 노래를 들어주는 클럽을 찾기 위해 디트로이트의 클럽이란 클럽은 모두 찾아다녔다. 실제로 그가 랩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오르기만 해도 욕설과 ‘내려가라’라는 야유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삼촌 로니가 연애 문제로 1992년에 차 안에서 권총 자살을 하는 사건이 터진다. 삼촌의 자살에 대한 충격으로 에미넴은 음악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으나 딸 헤일리 제이드 매더스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되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다.

후에 삼촌 로니를 추모하기 위해 자신의 왼팔에 문신을 새겼다. 버섯은 마약 버섯을 의미한다. 물론, 에미넴은 마약은 고사하고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본인이 설립한 레이블 Shady Records사 직원들과 가수들에게 또한 술, 담배, 마약은 하지 말라고 권하며 리아나에게도 하지 말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그렇게 욕을 먹고 야유를 받으면 주눅이 들 법도 한데 그는 계속해서 클럽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 순간 야유를 보내는 관중 앞에 무대에 서 그간 갈고닦은 라임을 세 마디 시작했더니 이내 야유는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에미넴은 점차 가사 쓰는 법, 비트 만드는 법을 하나씩 더 익혀나가게 된다.

클럽 생활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1996년 첫 번째 앨범 <Infinite>를 발매한다. 이 당시에도 이미 라임은 상당한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단 플로우에 딱히 자신만의 특징이 없었던 데다가, 에미넴이 랩을 할 때 목소리가 기존의 흑인들과 달리 하이톤이다 보니 ‘너무 어린애처럼 들린다’ 등 쓴소리를 많이 들었다. 가사도 무명 래퍼로서 생계를 꾸려가려는 몸부림 등이 중심이 되어 상당히 얌전했던 탓에 첫 앨범에서는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때 에미넴의 래핑을 들어보면 동부 래퍼 AZ, 나스와 많이 비슷하게 들린다. 결국 앨범은 ‘동부 래퍼들의 스타일을 교묘히 베낀 삼류’라는 혹평을 들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약 1000장의 판매고를 올린 게 전부를 끝으로 거의 묻히다시피 하고 말았다. 에미넴은 혹시라도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했지만 결국 아무런 기적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끝나버렸다.

에미넴이 어렵게 살던 시기였기 때문에 딸 헤일리의 분유와 기저귀 값을 벌기 위해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중 라디오에서 이 앨범이 쓰레기 같다는 악평을 듣고 상심했던 적이 있다고 그는 회상한 바 있다. 이에 그 당시의 수치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에미넴은 문신을 새겼는데 ‘Slit me(나를 베어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다가 1997년 LA의 지역방송이 주최한 랩 올림픽에 나가게 되고 2위에 그치긴 했지만, 그걸 딘 가이스 링어(Dean Geistlinger)라는 사람이 듣고 에미넴에게 데모 테이프를 요구하게 된다. 그렇게 에미넴의 테이프는 인터스코프 레코드로 전달되고, 닥터 드레가 그 테이프를 듣게 되었는데 그렇게 그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닥터 드레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When jimmy played this; I just said, “Find him, Now!”
(지미가 앨범을 틀었을 때, 나는 말했어, “걔 찾아와, 당장!”

 

에미넴과 닥터 드레

닥터 드레는 1998년 계약하자마자 에미넴에게 살을 빼고 몸부터 만들라는 주문을 한다. 비주얼부터 래퍼에 어울리게 바꿔야 한다는 코치였다. 사실 에미넴은 닥터 드레와의 첫 만남 때 자원 구호 단체에서 나눠주는 노란색 후드 점프슈트를 입고 나타났다. 나중에 드레가 말하길 바나나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에미넴의 인생을 송두리채로 바꿔놓은 계기가 된 앨범 이름이 바로 ‘The Slim Shady LP’의 전신 격 앨범인 <Slim Shady EP>이다.

그렇게 그는 흑인들의 전유물이던 힙합계를 당당히 정복한 백인 래퍼로 성장하게 되어 지금까지 현역에서 활동 중이다. 자신이 6개월에 어머니와 자신을 떠났던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도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것이 아들이 유명한 가수가 되자 감성팔이 인터뷰로 자신이 아버지라며 용돈벌이를 한다던가 공연장을 찾아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의 행동으로 끝까지 좋게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머니와 사이가 좋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어머니에게 학대를 당하고 자란 탓에 온갖 욕설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자신의 곡에 어머니를 디스 하는 노래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가 있었을 정도였다. 다만 서로 상대방의 말을 거짓이라며 까고 있으니 누가 진짜 사실을 말하는 건지, 누가 진짜 까일 만한 건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에미넴의 어머니

결국 에미넴은 2013년에 공개된 The Marshall Mathers LP2의 ‘Headlights’에서 법정 결과부터 시작해 여태까지 줄기차게 까던 어머니 데비를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Cleanin' Out My Closet’에서 어머니를 깐 것에 대해 사과했다.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가 미국의 어머니의 날에 맞춰 공개되는 극적 이벤트가 이루어졌다. 곡의 제목인 헤드라이트도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만 항상 같이 가야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렇게 에미넴은 어머니와 화해를 했다.


이혼한 전 아내 킴과의 애증관계도 이미 유명하다. 10대 시절부터 사귀어 결혼까지 했지만 각자의 사생활 문제 때문에 이혼했다. 2000년 6월 미시간 주 워렌의 Hot Rock Sports Bar and Music 카페에서 경비원 John Guerra와 키스하는 킴을 보고 격분해 권총을 쏘려 했는데 탄창이 비어있었고, 결국 경비원을 권총으로 예닐곱 번 폭행하는 사건도 벌인다. 이 사건은 그의 노래 ‘Sing For The Moment’에 묘사되고 있다. 해당 곡에서 그는 총이 아닌 주먹으로 Guerra를 때렸다고 주장했다.

에미넴이 유명해지고 난 뒤 둘은 재결합하였고 훗날 결혼식까지 올리며 재혼을 하였다. 하지만 몇 개월 뒤 성격차이가 심해져 다시 이혼하였다. 이때 헤일리의 양육권이 킴에게 넘어가 버리지만, 킴이 마약소지죄로 붙잡히고 나서 양육권이 박탈당한 후 겨우 헤일리의 양육권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2021년 8월 12일, 킴이 다시 자살시도를 했고, 다행히 목숨은 건진 상태라고 언론을 통해 밝혀지는 일이 있었다.


에미넴에게는 딸이 셋 있는데, 그중 유일한 친딸 헤일리를 포함해서 끔찍한 딸 사랑으로 유명하다. 딸을 디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자기 자신, 엄마, 와이프,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 등등을 까대는 작업을 하니 당연히 교육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작업실에 못 들어오게 한다. 앨범을 만들 때도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욕설이 없는 버전을 따로 만든다거나, 심지어 딸과 떨어지는 것이 싫어 해외 투어도 오래 하지 않는다.

이제는 대학도 졸업한 그의 딸 헤일리

한때 약물 중독까지 겪어가며 이후 퇴물 취급을 당했으나 <Not Afraid>, <Rap God> 등으로 컴백하며 퇴물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사실 그가 퇴물 취급을 당한 데에는 2004년 <Encore> 이후 새 앨범을 5년 동안이나 내지 않았던 영향이 컸다. 


하지만 그가 잠적 아닌 긴 휴지기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약물 중독 등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에미넴이 속해 있는 그룹 D12의 멤버이자, 에미넴에게 있어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친구 프루프의 사망이었다. 프루프는 2006년에 클럽에서 시비가 붙어 총격으로 사망했다. 이 5년 사이 소식도 뜸해지고 약물 중독에 빠져 죽을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에미넴이 한창 영화 <8마일>을 촬영하던 중, 하루에 16시간을 일하면서 영화 촬영과 음악 작업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부담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불면증을 앓게 되고, 이에 지인이 추천해준 수면제 종류의 약물에 손을 대게 된다. 나중에 밝히길 <8마일> 촬영 후에 나온 앨범인 <Encore>의 앨범 작업을 할 때의 기억은 거의 없다고까지 말할 정도로 당시 그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던 상황에서 친구 프루프가 사망하면서 더욱 스트레스를 받아 약 복용량을 늘려가다 보니 어느새 중독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이후 컴백 앨범인 <Relapse>의 수록곡 ‘Deja Vu’에 자기 고백적인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약물 중독으로 인해 화장실 바닥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렇게 병원에 실려간 이후로는 재활 치료를 받았는데, 그야말로 당시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배 속에 약물 복용을 중단하기 위한 헤로인 4봉 분량의 메타돈이 들어있었다며 담당 의사에게서 병원에 한두 시간 정도만 늦게 도착했어도 죽었을 거라고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친구 프루프와 함께

그렇게 약물중독 치료를 하면서 급격히 살도 쪄버리고 정말 망가진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에미넴도 이젠 갔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 5년간의 시간을 딛고 일어나 다시 2009년 앨범 <Relapse>로 컴백했다.


<Relapse>는 과거에 보여준 수위 높은 가사들도 이에 비하면 약하게 느껴질 정도로 굉장히 호러 코어 한 곡들로 가득해, 슬림 셰이디(그의 별명으로, 그의 또 다른 자아(이중인격)를 나타내는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Relapse>는 2009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힙합 앨범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그리고 2010년 발매한 앨범 <Recovery>는 일주일 만에 미국에서만 무려 741,000장, 현재 전 세계적으로는 10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이후에도 10년 가까이 꾸준히 음반을 내며 앨범을 발매할 때마다 미국 대중음악계 전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현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로 남아있다.


에미넴의 또 다른 진가는 바로 프로듀싱 능력인데, 에미넴의 대표작 중 하나인 <The Eminem Show>의 상당수의 곡들은 에미넴이 프로듀싱에 관여했으며 그의 최신작인 MTBMB Side B의 ‘Alfred's Theme’ 등의 곡에서도 혼자서 프로듀싱을 하여 뛰어난 비트를 뽑아내는 등 음악가로서도 정점에 오른 인물이다.




당신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이 백인래퍼의 삶은, 소위 말하는 화이트 트래쉬 계층의 찢어지게 가난한, 시작부터 재앙이라고 할 만큼 힘겨운 삶의 가운데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어린 싱글맘 밑에서 디트로이트의 슬럼가에 살았고, 아버지는 태어난 지 몇 달이 되지도 않아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렸고, 그 어머니는 마약 중독자였다. 


차라리 흑인이었으면 무리에 섞이기라도 편했을 텐데 백인이라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는 장애였다. 시궁창 같은 환경의 빈민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흑인들과 랩 배틀을 하며 이름을 날리고, 데뷔할 즈음에는 백인임에도 흑인들의 전유물이던 음악영역에서 인정받아 정상까지 오르게 된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는 자신의 정신적 지주이자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던 외삼촌의 자살을 경험해야만 했다. 그 아픔을 견뎌내고 정상에 오르고 난 뒤에도, 내내 여러 가지 유혹과 함정 같은 삶을, 마치 지뢰밭을 지나오듯 살아왔다. 겨우 정상을 차지했나 싶었는데, 가장 의지하던 친구가 다시 사망하는 사고를 겪게 되면서 약물중독에 빠져 5년간이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추락하는 삶을 사는가 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났고 그 수렁에서 벗어나 다시 정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바닥에 있던 사람이 한 칸씩 정상으로 올라가는 것도 어렵지만, 그렇게 오른 정상에서 미끄러져 추락한 이후에 다시 정상을 올라가는 것은 그 이전의 곱절이나 힘들다는 것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잘 안다.


10대에 서툰 사랑으로 맺어진 마약중독자 아내와 두 번이나 이혼하면서도 자신은 결코 마약은 물론이고 술과 담배도 하지 않는 자기 절제로 유명하다. 입양한 딸 둘을 포함하여 자신의 딸을 키우며 분유값, 기저귀 값이 없던 시절에도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고 자신이 부족한 것들을 채워나갔다.

처음 그가 들었던 음악은 그에게는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음악 세계를 소개해준 외삼촌은 유일하게 그에게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주며 기댈 수 있는 어른이었기에 그 음악세계는 그에게는 다른 이들에게 엄마였고 부모였을 것이다. 


물론 음악의 장르나 그 가사들이 굉장히 자극적이고 공격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의 10대에게 있어 음악은 어떤 식으로든 그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출구이다. 불과 10살이던 그가 학교 폭력으로 인해 9일이나 코마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부터 시작해서 그에게 어느 하루도 평온할 날이라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는 그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넘고 넘어 오십을 넘긴 지금의 나이까지 현역 래퍼로 미국의 전설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에미넴의 삶을 돋보기로 들여다보게 되면 시작에서부터 그 과정 과정에 이르기까지 그보다 더 기구할 수는 없을 정도의 삶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당신의 그 어떤 삶의 부분이 그의 이 고난으로 점철된 삶에 명함을 내밀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의 삶이 가장 처절할 정도로 비참했는가를 겨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보다 훨씬 힘겹고 비참한 삶에 놓여있던 사람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내서 지금의 성공적인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당신이 가정환경이나 학교폭력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가슴에 큰 멍을 담고 세상에 내팽개쳐진 것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더 편한 선택이 아닐까까지 생각했던 사람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당신이 살아있기에 이 아름다운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살아만 있다면 당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근거로 오늘 소개한 에미넴을 비롯하여 앞에 소개한 200명의 대가들의 삶이 있다.


어찌 보면 사람이 한평생 사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어른들의 옛말씀이 모두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게 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말의 의미는 대강 살던 열심히 살던 똑같은 결과와 과정일 것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공평하게 살아가는 한평생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된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의 그 한평생을 제대로 살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당신을 세상에 보내준 부모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경과 효도의 방식임과 더불어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자라고 당신을 기억하게 될 자식에 대한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 자신에게 부끄럼 없는 삶을 만들어 나아야만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이다. 당신의 삶에 무슨 기대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마는, 당신의 삶이, 그 미래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기대에 노력을 더해가는 것이 바로 삶이다.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한 당신의 노력이 설사 당장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도 당신의 노력은 결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돌아올 멋진 내일을, 그 미래를 위해 결코 그 노력을 멈추지 마라.


도저히 안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까지도 희망과 노력의 끈을 놓지 마라.


바로 앞이다. 

이제 당신이 보상받을 순간인데 그 앞에서 포기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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