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아, 오늘은 엄마가 밤이 깜깜해지면 집에 올꺼야. 이모님이랑 저녁 잘 먹고 아빠랑 놀고 있으면 엄마가 일 열심히 하고 웅이 자기 전에 집에 올께요."
웅이 입이 쭈욱 나옵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나오는 버릇입니다. 이럴 땐 모르는 척 더 밝게.
"엄마가 공룡처럼 쿵쿵 거리면서 올까? 스포츠카처럼 슈웅- 달려올까?"
"공룡!"
얼마 전까진 스포츠카처럼 오라더니 공룡에 빠진 요즘은 항상 공룡을 고릅니다. "그럼 엄마 공룡처럼 올께요. 웅이 오늘도 재밌고 씩씩하게 지내~."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 오늘은 야근하는 날입니다. 야근 좋아하는 직장인이 누가 있겠냐마는 엄마가 되니 야근은 가급적, 적극적으로 피하고 싶습니다. 아니, 피해야 합니다.
미리 해 둘 수 있는 일은 새벽에, 미룰 수 있는 일은 아이들을 재우고 늦은 밤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야근은 있습니다. 엄마이지만 직장인이기에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야근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예고된 야근과 예고되지 않은, 돌발 야근. 그나마 예고된 야근은 괜찮습니다. 대비를 할 수 있거든요.
야근이 정해지면 가장 먼저 베이비시터 이모님께 일정을 말씀드리고 달력에 표시합니다. 평소에는 네식구가 같이 저녁을 먹지만, 제가 야근하는 날은 시터 이모님께 두 아이 저녁을 미리 먹여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제 생후 18개월인 결이 낮잠도 충분히 재웁니다. 결이는 그네 타다가도, 책 읽다가도 스르륵 잠드는 편인데, 밤잠만은 엄마 품을 고집합니다.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려면 낮잠을 푹 자야 합니다.
가끔 야근을 하는 웅이 아빠도 제가 야근하는 날은 칼퇴근합니다. 웅이 아빠가 퇴근을 해야 시터 이모님이 퇴근을 할 수 있으니 늦으면 안됩니다. 저녁도 후딱 해결하고 오라고 신신당부합니다. 남편이 아무리 자칭타칭 ‘육아빠’라지만 혼자 애 둘을 보면서 저녁을 챙겨 먹는 건 무리입니다.
일단 이 정도만 ‘대비’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결이가 계속 울어. 기저귀도 갈아주고 과자도 줬는데 소용이 없네. 뭘 해볼까?’ 돌발상황이 생기면 남편이 카톡을 날릴테니 전 휴대전화를 주시하며 일하면 됩니다.
문제는 ‘돌발 야근’입니다.
제가 갑자기 야근을 하게 되면, 베이비시터 이모님의 퇴근도 늦어집니다. 이모님도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라 우리집에서 ‘칼퇴근’ 하셔야 이모님 가정의 저녁을 챙길 수 있습니다.
저 한 명 늦으면 우리 가족 셋, 이모님 가족 넷. 7명의 저녁이 흔들립니다.
그나마 남편이 칼퇴근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나쁜 일은 겹쳐서 옵니다. 꼭 제가 갑자기 야근하는 날은 남편도 갑자기 야근입니다.
이런 날은 '오늘까지 꼭 마무리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일을 마무리하고 넘겨야 다른 팀원이 이어받아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이 일찍 퇴근해라' ... '카톡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 십상입니다.
‘저녁 먹기 전에 오겠다’고 손가락 걸었던 엄마가 오지 않으니 아이들은 칭얼댑니다. 졸린 결이가 울기 시작하면 웅이도 ‘엄마 보고싶다'며 같이 웁니다. 남편의 지친 목소리 너머로 아이들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워킹맘에게 '회사에서 퇴근'은 곧 '집으로 출근' 입니다. 회사에서 야근을 하게 되면 집에 '지각'하게 되는 꼴입니다. '대체인력' 없는 엄마가 '지각'하니 남편과 아이들은 멘붕, 집안은 아수라장입니다.
워킹맘들은 직장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예측하지 못한 야근과 회식을 꼽습니다. 10년 전 설문조사에서도 같은 어려움을 토로한 걸 보니 그동안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았나 봅니다.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대한민국은 아직 연간 노동 2163시간(2013년 기준), OECD 최장시간 노동국가입니다. 남편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내의 취업여부와 무관하게 가사와 양육의 주책임자는 엄마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한 필요한 야근이 있다는 건 동의합니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보고 싶네요. 그 야근. 꼭 지금, 꼭 여기에서 해야 하는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