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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틈틈이 Apr 07. 2016

31살 연하남은, 까칠했다

드디어 5살 아들, 웅이와 데이트하는 날입니다.


계획을 한 날부터 '웅아, 목요일에는 엄마랑 뮤지컬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꽃놀이도 하자'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습니다. 입 가볍기로 소문난 저에겐 정말 힘든 일이었습니다.


데이트를 숨긴 건 혹시 갑자기 회사에 출근해야 할 상황이 되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웅이가 알면 분명히 결이에게 자랑할텐데 웅이 입막음을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목요일 아침. 평소와 같이 어린이집에 가는 것처럼 집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로비에 도착. 웅이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웅아, 오늘은 어린이집 안가고 엄마랑 웅이랑 둘이 뮤지컬 보러 가는 날이야."


방방 뛰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돌아온 반응은,



"그래? .그러지 뭐."


... 싸늘한 반응에 할 말이 없어 뚜벅뚜벅 걷는데 웅이가 "근데 엄마 회사 안가?" 묻습니다. "오늘은 엄마 회사 안가는 날이야. 그래서 웅이랑 엄마랑 둘만 하루 종일 놀꺼야."


"우와! 엄마 회사 안간다! 나 어린이집 안간다! 놀러간다! 우와!"

이녀석, 이제야 엄마와의 데이트가 뭔지 이해했나봅니다. 아파트가 떠나가게 큰 소리 치며 좋아합니다.


"근데 그럼 우리 뭐 해?"

"구름빵 뮤지컬 보러 가자. 누나 형들이 나와서 구름빵 이야기도 들려주고 노래도 많이 들려준대~"

"에이, 시시하겠다. 나 안 갈래."


야심차게 계획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데, 웅이는 도리질을 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진짜 구름빵을 준다고 해도 도리질, 친구 준성이도 봤는데 엄청 재밌었다고 하더라고 (거짓말을) 해도 도리질.


엄마 마음을 몰라주는 5살 아들이 야속합니다. '내 아들 맞아? 왜 이리 까칠해?' 속으로 씩씩대다가 웅이는 놀러가자며 웅이 말은 들어주지도 않는 엄마가 야속하겠다 싶어 뮤지컬 관람은 접기로 했습니다. (일부 환불이라도 받고 싶었지만 공연 당일에는 취소가 되지 않더군요. 또르르)


"그럼 우리 뭐할까?" 웅이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집 갈까?"

"토요일에 갈꺼야.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럼 이모집 가자."


이종사촌형은 학교에, 이종사촌동생은 어린이집에 가서 이모집에 이모 뿐이 없다고 해도 이모집에 가자고 합니다. 툭하면 만나는 이모인데 굳이 오늘도 이모네 집에 가겠다니, 한숨이 나옵니다. '진짜?' 여러 번 물어도 '진짜!' 랍니다.


휴... 웅이를 위한 하루이니, 웅이 뜻을 따라야죠. 이모집으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 30분 거리인데 웅이는 굳이 지하철을 타고 가자고 합니다. 그것도 꼭 1호선을 타야겠다고 고집합니다. 이모집은 1호선 라인이 아닌데, 1호선을 고집하니 3번 갈아타야 합니다.



1호선을 탑니다. 웅이는 재빨리 빈자리를 찾습니다. 신발을 벗더니 의자에 올라앉아 창문에 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창 밖 풍경을 감상하네요.


"아 맞다, 엄마 칸쵸 없어?"

"칸쵸 먹고 싶어? 지하철에서 내리면 사줄게."

"지금 먹어야 하는데, 옛날에 우리 지하철타면 칸쵸 먹었잖아."


결이가 태어나기 전 일입니다. 지하철 타기를, 그 중에서도 지상으로 다니는 1호선을 웅이는 참 좋아했습니다. 틈만 나면 웅이와 1호선을 타고 돌아다녔습니다. 목적지는 없습니다. 웅이는 그냥 지하철 타고 내리고 지하철이 멈췄다 출발하는 걸 보기를 좋아했습니다. 지하철에서 웅이 목소리가 너무 크면 주변에 민폐이니까 칸쵸 한 봉지를 쥐어주곤 했습니다.


웅이는 결이가 태어나기 전 엄마와 툭하면 하던 그 데이트가 생각났던 겁니다.


이모집에 진짜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지하철을 타려는 핑계였던 모양입니다. 이제 웅이 마음을 알았으니 웅이가 지하철을 그만 타자고 할 때까지 용산에서 신도림, 신도림에서 구로, 구로에서 다시 신도림, 신도림에서 용산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3시간 정도 지하철 여행을 하니 웅이는 슬슬 배가 고픈가 봅니다. "엄마 이제 우리 찐빵 먹으러 가야지." 우리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웅이 얼굴만한 찐빵을 파는 집이 있습니다. 웅이와 지하철 놀이를 하면 찐빵 하나 사서 나눠먹으며 집에 오곤 했습니다. 저는 잊었는데 웅이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찐빵 하나, 음료수 두 개를 사서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습니다. 눈이 마주치니 웅이가 싱긋 웃으며 "엄마랑 같이 있으니까 좋다"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웅이가 "결이도 데리고 올까?" 하네요.


"오늘은 웅이랑 엄마만 있어도 되."

"그래? 그럼 우리끼리 더 놀자."

...

"엄마, 결이는 뭐 할까?"

"이모님이랑 재밌게 놀고 있지 않을까?"

...

"엄마, 결이랑 놀이터가서 찐빵 같이 먹을래."


하루 종일 웅이랑 둘만 즐기려던 데이트는 오후 3시, 그렇게 조기종료됐습니다.


특별한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는데, 웅이와 툭하면 하던 지하철 놀이가 특별한 일이 된 게 괜히 미안합니다.


피곤했는지, 웅이는 오늘 9시에 잠들었습니다. 뽀뽀하자면 볼을 쓱 내미는 '뽀뽀 짠돌이' 녀석이 오늘은 먼저 다가와 입술에 찐한 뽀뽀를 남기고요.


세상의 모든 첫째는 엄마의 초보시절을

함께하겠죠. 초보 엄마 믿고,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주는 웅이가 참 고마운 하루입니다.


# 틈틈이 이야기는 네이버 포스트 (post.naver.com/zinc81)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방문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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