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릴 적 꿈을 초과 달성 시켜 주었던 추억의 비행
어릴 적 시외버스를 타면 차멀미 때문에 무척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차멀미는 고사하고 지독한 매연조차 사랑스러워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나중에 커서 운전수 될 거라며 기특해하셨다. 그러던 내가 성인이 되어서 새 차를 샀을 때도 그 실내의 휘발성 있는 신차 내음이 좋아서 반나절을 차에서 뒹굴거리며 즐긴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김포공항에서 군생활을 한 탓인지 자연스럽게 비행기 사랑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회사 신입사원 일 때는 해외출장 가는 사람들을 무척 부러워했다. 비행기를 탈것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내가 어쩌다 해외 출장(당시 FA관련 업무는 대부분 일본이었다)을 가게 되면 하루종일 들떠서 관리부에서 미리 받아 든 비행기표를 매만지며 어릴 적 소풍 가는 날인양 이리저리 이유 없이 걸어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 일본도 여러 번 다니다 보니 이제는 차츰 비행시간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가까운 곳 보다 비행기에서 영화도 보며 기내식도 여러 번 먹는 유럽 가는 비행기를 한번 타봤으면 기대를 하고 있었다.
당시 세계적인 경제 분위기에 따라 S사의 해외공장 증설이 계속 늘어나던 때라 나도 그 대열에 합류가 되어 건설팀요원으로 나의 꿈도 이룰 수 있는 해외출장의 막이 올랐다. 말레이시아, 중국, 태국, 동남아시아를 자주 다니게 되었으며 때로는 설비 검수차 독일도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원하던 기내식도 두 번씩이나 받아먹고 잠도 실컷 자도 아직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을 맘껏 누려보았다. 이것이 장거리 비행 탑승의 끝을 본 것 같자 서서히 비행의 호기심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브라질 마나우스에 공장을 건설한다고 하여 그 팀에 합류가 되었다. 브라질이 어딘가 한국에서 땅을 파 들어가면 뚫고 나온다는 남미가 아닌가 당시에는 대한항공이 브라질 상파울루까지 가는 직항이 있었다. 한국에서 LA까지 가서 내려서 한참을 대기후 다시 같은 비행기를 타고 LA에서 상파울루 가는 비행이다. 무려 3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 인생에서 최장의 비행기를 타는 기록을 남기게 되며 이제야 말로 정말 꿈을 달성해 보는구나 하는 생각에 소위 말해 무릎이 저절로 빠져나간다는 이상한 경험도 버티며 식사를 네 번씩이나 먹어도 아직 간식을 더 먹여야 한다고 하고 잠을 두 번씩이나 잤는데도 아직이다. 하지만 어릴 적 꿈이었으니 마냥 흥미로웠다. 그리고 본격 브라질 일이 시작되면서 이곳 마나우스를 여러 번 더 와야 한다는 희망이 나를 또 기분 좋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 도착한 브라질 상파울루 공항에서의 말로만 듣던 남미의 정렬적인 문화적인 충격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느껴보기도 전에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마나우스 까지 가는 국내선을 타려고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국내선 게이트로 바삐 뛰어야만 했다. 처음 몇 번은 다행히 시간에 맞춰 국내선 직항을 타고 마나우스까지 또 네시간여를 날아갔다. 장거리 비행이 더 추가되어 꿈은 이제 더 이상 이룰 수가 없을 정도로 달성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 번은 보안검사가 지연되면서 마나우스행 직행 비행기를 놓쳤다. 그러면 국내 완행 비행기(우리가 그때 그 비행기를 완행이라 불렀다)로 자동 연계가 되며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 작은 비행기는 마나우스 가는 도중 새로운 손님을 내리고 태우거라 네 번 정도 작은 시골 공항에 이착륙을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형식적인 스튜어디스 할머니의 건성인사를 받으며 긴장했었다. 그것 보다도 이 비행기는 난기류에 약했었던 것 같았다. 흐느적거리며 날아가는 통에 우리 모두 겁을 먹었었고 이착륙할 때마다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바이킹도 못 타는 놈이 된 것이 이것 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이 완행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면서 급기야 꿈에도 가끔씩 출연하는 이 비행에 무척 재미있는 고생을 했었다. 어쨌든 그 완행 비행기 덕분에 나의 어릴 적 꿈을 조기에 초, 초과 달성했던 기억이 이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즐거워지려고 해서 잊힐까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