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을 새워 내린 비에 깨끗해진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동해바다 쪽으로 내달리다 멈춘 자그마한 한정식 '별미여행' 큰 기대 없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깔끔하다. 미리와 있는 조카들은 유리창에 플래카드를 붙이려 애를 쓰고 있고 벌써 음식들을 상에 올리려 직원들도 분주하여 덩달아 가지고 온 케이크와 장식물을 꺼내 들고 한 몫하려 바쁜 척 움직였다.
곧이어 친척들이 모여들면서 다들 오랜만이라 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플래카드 한 귀퉁이가 떨어져도 케이크가 밀려나도 웃음소리에 묻혀든다.
언제나처럼 주인공은 나중에 등장하신다. 눈이 어두워지신 아버님을 조심스레 손잡고 모셔와 자리에 안내하자 종달새처럼 지저귐 소리가 어느새 날아가고 조용한 아버님 인사말이 흐른다.
'오늘 이렇게 모여서 음음 크흠 ~'
목이 메시는지 떨리시는 음성을 잠시 멈추시더니 괜한 플래카드 탓을 하시곤 다시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이으셨다. 우르르 어느새 몰려든 핸드폰셔터 소리에 맞춰
'생신 축하 합니다 생신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 ~'
박수소리와 함께 아홉 개의 촛불을 모두 불어 끄셨다. 그리고 힘이 부치신지 케익을 자르시다 쿡 찌르고 마셨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던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날라든 종달새의 지저김 속에 하하 호호 동해의 산해진미가 풀어헤쳐져 식당 안에 춤을 춘다.
어느덧 식사가 마무리되자 아버님께서 한쪽으로 모두 모이라고 하시더니 이 자리에서 유언을 하시겠다고 한다. 엥~ 순간 당황 하였지만 평소 맺고 끊으심이 분명하신 아버님은 준비해 온 당신의 식순에 따라 이어 나가신다.
'장수하신 할머니 께셔도 92세에 돌아가셨기에 친척들 모인 김에 내가 미리 유언을 하려고 한다'
하시며 비장하게 종이를 펼쳐드시고는 읽으신다. 몰려든 조카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마치 기자회견 하듯 연신 사진을 찍으며 에워 쌓는다.
내용이야 지금까지 해오던 가족전통과 다른 방식의 당신의 장례절차 요구와 고향집 처리와 삶의 교훈이 전부였으나 힘주어 말씀하실 때마다 더욱 굽어지는 아버님 등 울림이 파동을 일으켜 묵직한 메아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 그래서 모두 지금처럼 우애 있게 계속 잘 지내기를 바란다'
마무리를 지으시며 자리에서 일어서실 때는 뭉클한 감동의 여운으로 새삼 아버님이 멋져 보이셨다.
딸과 함께 아버님을 고향집에 모셔드리고 앞마당에서 사진도 찍으며 긴장을 풀어 드리고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과의 뒤풀이를 위해 또 달려갔다.
성장한 아이들의 인사를 다시 받으며 기울이는 술잔마다 다들 아버님의 칭송이 가득 찬다. 어디 요즘 부모들의 가르침에 아이들 가슴에 새겨들을 이야기가 몇이나 있겠냐마는 오늘 할아버지의 당당하신 모습에 조카들도 적잖이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자기들끼리도 할아버지 건강의 건배도 하는 것을 보니 흐뭇하다.
이렇게 아버님 구순생신 축하연을 마무리하면서 집안의 어른이란 무릇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셔서 감사하며 역시 나 같은 꼰대의 나불거림과는 그 무게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