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당시만 해도 생소하게 느꼈던 전자공학이 졸업 무렵 상종가를 치며 인기를 끌 때이다. 대부분 전자업체 한두 군데의 부름을 이미 받았지만 이상하게도 전자회사도 아닌 당시 기계의 성지로 굴림하며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로 유명했던 대우중공업에 전자공학 출신 백여 명의 신입들이 모인 것이다. FA와 Robot, 방위산업의 전자화를 내걸며 만든 전자기술실의 매력과 당시 타업체보다 더 높은 급여가 이들의 마음을 이끈 모양이다.
그 백여 명 중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이들과 함께 89년 삭막한 중공업의 성지 경남 창원 대우중공업 전자기술실로 모여들었다. 타지에서 갑자기 모여든 이들의 머물 곳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던 회사는 시청 앞 은아아파트 몇 채를 빌려 임시 기숙사로 사용하게 했다. 다들 난리가 났다. 지역도 생소한 데다 한창 들뜬 갓 입사 청년들이니 그 백여 명의 혈기를 어찌할꼬 다들 추억으로 간직하겠지만 다행히 큰 민원은 없었던 것 같다. 혹시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시작되어 하드웨어 전문가로 아날로그 설계전문가로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SI전문가로 로봇전문가 FA전문가로 각자 나뉘어 기술을 배우며 미래의 꿈을 꾸던 전자공학 출신 백여 명의 동기들이 있다.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 지금껏 연을 이어온 그들을 만나러 창원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침 9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수서에서 진주까지 가는 SRT가 마음을 이끌었다. 대구를 힘차게 벗어나자 경남 쪽으로 향하는 차창에는 추억의 스크린들이 비치더니 영화에 나올듯한 조용하고 깔끔한 역들이 지나간다. 그렇게 밀양, 진영을 지나 창원역에 도착했다.
지금은 다들 여러 곳으로 흩어져 기술전문가로 교수로 고위공무원으로 회사임원. 대표로 맹활약을 하고 있지만 만나면 세월을 함께 올라탄 관성으로 하나도 변함이 없는 얼굴들에 감출 수 없는 개구쟁이의 끊이지 않던 사고와 소란의 추억 속으로 금세 들어간다.
여기 30여 년이 흘러도 변함없는 입담에 시간을 녹이며 즐거운 한잔을 나누고 있는 명색이 대기업 임원, 부장 출신에다 지금은 중소기업 사장, 부사장들인 이들이 있다. 혈기왕성하고 철 모르던 입사 초년의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언어로 장난치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이다.
포커 치던 이야기에 연애를 하며 울고 웃던 이야기 그리고 과욕이 저지른 무용담은 배가 되어 있다. 그렇게 다투고 싸우며 헤어졌던 입사 동기들이 살아오며 마음 졸였던 일, 말 못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여기는 핑계의 여건이나 사회적 포지션과는 아무 상관없이 추억의 장난으로 압축되어 세월이 만들어준 짓궂은 개구쟁이들로 들뛰고 있을 뿐이다.
한바탕 신나게 어릴 적 무용담의 크기로 웃고 떠든 소란은 2차 자리로 옮기자 조용해지며 차분해졌는데 대화는 좀 이상하다. 뜬금없이 집안 청소 이야기가 나오더니 로봇청소기 자랑 베틀이 진행 중이다.
'사주길 잘했어 로봇청소기 사고 나니 만사가 편해'
'우리 집 청소기는 일 시키고 밥 먹으러 나오면 다 끝내고 청소완료 했다고 문자가 와 ㅋㅋ'
'우리 것은 스스로 걸래도 빨고 먼지도 모아줘'
'어 그런 게 있어? 그거 어디 거야 나 좀 가르쳐줘'
로봇 청소기 베틀에 신이 났던지 이번에는 주방으로 까지 향한다
'우리 식기 세척기는 초음파로 돌리는데 깔끔해'
'무슨 소리야 손으로 해야 좋은 거지'
그래도 사이사이 세계 금리 이야기, 미국 채권시장 이야기, 국내주식 이야기 등 투자 이야기가 있었으니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모인 사람의 정체가 의아했으리라
다들 나이 들고 퇴직하여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탓에 집안 관심도 부쩍 커진 것 같다. 밖에서 보면 진중하게 무게 잡고 있을 그들인 것이다.
추억의 친구들을 만나면 늘 이렇게 가벼워서 좋다.
그 시절로 돌아가 한껏 추억의 과욕을 부리다 보면 다시 살아가는 힘을 얻기도 하고 막힌 속을 풀어내는 세상 해우소가 되기도 하는 즐거운 시간이다.
그런데 사실 어디 여기뿐 이겠는가 그동안 살아오며 여기저기 흩뿌려 강하게 박혀있는 추억의 조각듵이 있으리라 이제는 억누르고 눈치에 움츠렸던 여건이라는 핑계를 거둬 드릴 때가 되었다.
다들 눈이 풀려 조용해진 친구들과의 선 넘은 대화는 이렇게 '다음에 보자'는 말에 꼬리가 잡혀가지만 이 편함은 어디에서 또 누려 보겠는가 정말 즐거웠다 친구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