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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롱혼 Dec 09. 2023

내가 공부하는 이유

느끼고 있는 것을 확실하게 새겨 넣으려는 약한 심리  

책상 앞에 자판을 매만지면 막상 쓸 말이 없어서 고민이다.


일기는 주저리주저리 잘도 떠들더구먼 남에게 보이는 글은 왜 이리도 고민스러운지 멍하니 썼다 지우기만 반복한다. 그것보다도 다음을 두려워해 아예 덮어 버릴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글쓰기 공부를 하겠다고 두리번거리다 이곳 문예창작반에 까지 오게 되었다. 


첫날 낯선 문을 열고 들어오니 부지런하신 아주머니께서 인상 좋으시다며 가벼운 수다로 반갑게 맞아주신다. 이 문예창작 클래스를 10여 년 함께 오신 등단 시인이라 소개하시며 쾌활하신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셔서 무척 편하다. 수업은 이번 학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10여 년을 이어오다니 갸우뚱하다. 


내친김에 열심히 공부하려는 모범생으로 앞줄에 앉으려니 얼른 다가오셔서 자리를 정해준다. 여기는 기존에 앉으시던 분이 계시다고 했다. 기존분들이 많으신 모양이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겼다. 


학생증도 받고 서로 소개를 나누어 보니 이미 수강하셨던 분들도 이미 등단하신 분들도 계속 반복 수강을 이어가고 계셨다. 배움의 목적도 있겠지만 친목의 목적도 함께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적극적인 connecting이 중요한 시대이다.

 

지도 교수님의 첫 강의는 차분하지만 강렬했다. 글을 순하게 순탄하게 보다 좀 더 격정적으로 거칠게 쓰라 하신다. 마치 나에게 하시는 말씀 같다. 구체화된 보편타당한 설득력의 글들을 재미와 교훈을 담아 쓰면 좋을 것 같다며 일기가 아닌 글은 독자를 위한 것이기에 뭔가 소위 생긴 것과 다르다는 말을 듣게 써 보라 하신다. 




어려서부터 특기가 뭐냐고 하면 그냥 글쓰기라고 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별 특기가 없다는 이야기다. 그랬던 것이 글짓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시골학교 백일장에 참여하여 상을 받고부터이다. 특별히 배운 적도 없고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을 분위기도 아닌데 남들이 잘한다고 추천하니 그런 줄 알고 그 보답으로 늘 모범적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한 번은 백일장에 나가서 시를 쓰는데 가을이라는 주제를 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니 떠오르는 것은 파란 하늘과 고추잠자리 밖에 없었다. 사실 전날 벼를 베는 곳에서 사람들이 몰아준 메뚜기를 잡거라 정신없이 이놈 저놈 부딪히며 숨바꼭질하듯 몰려드는 메뚜기를 잡느라 재미있었는데 그 즐거움을 쓰려니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 같아 모두 다 알이 듣는 말들만 나열하고 나왔다. 참 순진했다. 글은 그렇게 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순진이 지금까지 나를 옭아 매고 있으니 큰일 났다. 논문을 쓰듯 사실에 입각하여 차분히 신문기자라도 되는 양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나이에 글을 쓰려면 내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는대도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소위 생긴 대로 쓰고 있다.


그렇게 밖에서 글감을 쫓아 애쓰다 보니 매번 글이 막히고 한계에 답답했는데 오늘 '순하게 순탄하게 보다 좀 더 격정적으로 거칠게 내 감정을 표현하라' 하신 말이 큰 울림으로 막혔던 감정을 풀어 울컥해졌다. 


느낌으로 가지고 있지만 실제 잘 안 되는 것을 전문가의 힘을 빌려 새겨 넣고 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날 > 


멘붕이다

희멀건 정신에 빨간 꽃은 피었건만

주워 담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더라

이리저리 돌려봐도 안된다 


많이도 담고 있는 할머니

어떻게 하긴 그냥 줍는 거지 


그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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