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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롱혼 Jan 31. 2023

여백(餘白)의 DNA가 있었다

안정된 단순함과 몸과 마음의 가벼움 그리고 생각의 유연함을 위하여

그림이나 문서 그리고 서식에서 아무것도 없이 비어있는 부분 특히 동양화의 흰 부분을 여백(餘白)이라 한다. 공간의 여유와 편안함으로 철학적 대피장소로도 생각하는 여백은 단순하면서 꽉 찬 활용성이 높은 창의가 나온다. 그러기에 그곳은 정답은 없지만 모두가 정답일 수 있는 아량의 실용이 있는 곳이다. SNS가 이끄는 우리의 삶은 가진 것이 없어도, 아는 것이 부족해도, 늘 모두 다 가진 것처럼, 많이 든 것처럼 가꿔 보려 한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이 가진 여백에 자꾸 덧칠을 하게 되어 그 화려함과 복잡함에 오히려 지쳐버린다. 


단순함으로 향하는 지름길의 용기가 여백의 실용인 것이다. 고기를 폼나게 무딘 칼로 자르는 것이 아닌 아닌 가위로 썩둑 썩둑 잘라내는 우리네 여백 속에 품은 기백이 서양의 격식과 룰을 뛰어넘는 실용으로 세게를 놀라게 한다. 그래서 복잡할수록 비워 간단하게 하라는 것이다. 


예전 모회사 전자기술실이라는 연구소에 신입사원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에는 사무실에 책상마다 재떨이가 놓여있어 누구나 담배를 피울 수 있으며 마치 당시 TV드라마에서 나오던 수사반장의 사무실처럼 어지럽게 서류들과 책들이 쌓여 있었다. 많이 어지러워야 일을 열심히 하는 듯 경쟁적으로 어지럽혔다. 그때 유독 한 분 이수형이라는 분(칭찬이니까 실명이라도 괜찮다)만 깨끗이 치워진 책상에 그 흔한 결재판 하나도 없이 달랑 A4용지 한 묶음에 연필 한 자루만 놓고 근무를 하였다. 의아했다. 하지만 어려운 프로그램과 Servo 쎗팅 기술 관련 문의는 다 그분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주변이 정리되고 깨끗하면 머리도 차분해지고 생각도 맑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한 가지 일을 마치면 또 하얀 백지만 펼쳐져 있는 그 거룩했던 모습,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은 참 대단하셨다. 여백의 의미를 이미 깨우치셨던 나름의 선각자였다. 지금 세월이 지나 무엇을 하고 계신지 잘 모르겠으나 아마 삶을 잘 살아오셨을 것 같다.


나도 그때 그분을 잘 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분처럼 백지 한 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업무는 하지 못했다. 그것도 그만한 경륜이 있어야 가능 한 일인 것이다. 대신 책상 위에는 하고 있는 단 한 가지 일만 올려놓는 것은 시도했었다. 지금도 나의 사무실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런 좋은 모습의 각인된 바람으로 오래전부터 나의 별칭은 여백(餘白)이다. ‘점점 더 나아지기 위한, 여백의 일상’이라는 나의 Tistory에서 나를 여백이라 칭하며 매일매일 비우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증명은 또 있다. 얼마 전까지 대부분 회사에서는 5S활동 이라든가 TPM, Simple is best, 보고는 한 장으로 등등 온갖 플래카드를 나부끼며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함을 참 많이들 강조하는 활동을 하였다. 우리의 DNA에 여백이 이미 있는데도 기술지향의 선진국 기술만 쫓다 보니 창피해하며 숨겨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라 우리의 여백이 반도체, K-pop, K-culture를 만들어 세계를 리드하고 있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앞으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관통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트렌드는 분명 우리네 여백의 창의와 실용이 될 것이라 본다. 요즘 핫해지는 Chat GPT를 비롯 수많은 AI는 정보 분석으로 최적화를 찾고 결합할 수는 있겠지만 비워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요약되고 함축된 하나의 언어. 쉽고 누구나 다 아는 쉬운 글, 비움으로 생긴 실용으로써 여백이 완성하는 글을 추구한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 역량으로 배움의 길이지만 언젠가 점 하나만 찍을 용기의 그날을 위해 오늘도 명상으로 비워 내고 있다.


안정된 단순함과 몸과 마음의 가벼움 그리고 생각의 유연함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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