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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는’ 기술에서 ‘보이는’ 능력으로

보이지 않는 혁신

by AI러 이채문


지난 시간에 이어서 글을 작성하고자 한다.




1. 능력인가 속임인가: 스타트업의 태동과 철학적 모순


기술의 발전은 언제나 윤리와 나란히 걷지 않는다. 오히려 윤리의 그늘 속에서 더욱 빨리 달려간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 인공지능 회의 비서 스타트업 ‘클루얼리(Cluely)’는 이러한 패러다임의 대표적인 사례다. 창업 초기, 이들은 스스로를 “모든 것을 속이게 해준다(Cheat on everything)”는 자극적인 슬로건 아래 세상에 내보였다. 기술의 출발점이 ‘능력’이 아닌 ‘속임’이었다는 점에서, 이 기업은 일찍이 철학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루얼리는 단 1주일 만에 연간 반복 수익(ARR)을 300만달러에서 700만달러(약 96억원)로 두 배 이상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단순한 매출 증가가 아니라 ‘기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실질적인 ‘력(力)’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며, 사회적 통용성을 획득한 결정적 시점이다. 다시 말해, 속임의 가능성으로 태어난 기술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위장된 채, 사회적 도구로 편입된 것이다.


창업자인 로이 리와 닐 샨무감은 클루얼리를 통해 회의와 면접, 인터뷰 상황에서 사용자 몰래 실시간 메모를 생성하고 맥락 기반 질문까지 제안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능은 회의 참여자에게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는 비서’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술이 ‘보이지 않음’을 통해 사용자의 역량을 확대시키는가, 아니면 은폐된 방식으로 타인의 신뢰를 저해하는가?


이는 마치 물리학적 의미의 ‘력’이 작용하되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기력이나 중력처럼, 기술이 인간 사회 속에서 ‘비가시적 권능’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겉으로는 능력처럼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속임이라는 방향성을 품고 있다면, 이는 과연 능력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공지능, 도덕을 벗어나는가 - visual selection.png



2. 힘과 능력의 경계: 기술의 진화와 복제 가능성


기술은 언제나 복제될 수 있다는 속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클루얼리의 AI 비서 기능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한 바로 그 순간, 유사 기능을 개발한 경쟁 제품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복제 기반 스타트업 ‘피클(Pkl)’은 오픈소스 기반 회의 비서 ‘글라스(Glass)’를 깃허브에 공개하며 단 하루 만에 850개 이상의 별점을 획득했고, 150회 이상의 소스 복제가 이루어졌다. 이는 기술의 ‘력(力)’이 결코 고유하지 않으며, 모방 가능성이라는 특성상 단기적 우위를 갖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상황은 ‘능력’이라는 개념이 단지 하나의 기술만으로 구성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철학적으로 보자면 능력이란 하나의 결과물이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기술적 이해, 시장 적응력, 사용자 신뢰도, 브랜드 전략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총합적 상태다. 다시 말해, 능력이란 단일한 힘이 아닌, 복수의 ‘력’이 방향성을 갖고 조율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클루얼리의 성공은 단순한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초기 슬로건부터 투자 유치, 기능 차별화, 기업 고객 확보까지 ‘다중력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단순한 회의 요약 기능이 아닌 ‘실시간 메모 + 관련 질문 제안 + 팀 보안 설정’ 등의 기능이 통합된 결과물이다. 이는 기술의 ‘운동성’을 높이는 요인이며, 복제가 가능하더라도 동일한 방향성과 목적성을 갖지 못하면 동일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결국, 복제 가능성은 힘의 속성일 뿐, 능력의 본질은 아니다. 복제는 가능성을 열지만, 방향성 있는 실현은 오직 전략과 통찰이 결합된 능력으로만 이뤄질 수 있다.




3. 결론: ‘능력’이라는 말은 과연 중복인가


능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히 잠재성의 차원이 아니라, 실현 가능성과 방향성을 포함한 힘의 총체적 성질이다. 클루얼리는 이를 기술로 실현한 스타트업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들의 출발점이 ‘부정행위 도구’라는 도덕적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공동 창립자 로이 리는 콜롬비아대학교 재학 중 면접에서 AI로 부정행위를 하는 도구를 개발하다가 정학 처분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클루얼리를 창업하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능력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된다. 능력은 올바른 방향으로만 발휘되어야 하는가? 혹은 그 방향성이 도덕적이지 않더라도, 실현 가능성만 갖추고 있다면 능력으로 인정되어야 하는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은 평범함 속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능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윤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때로는 그 윤리적 모호함이 오히려 기술적 진보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클루얼리는 그 모호함을 극대화한 채, 결국 'Everything You Need. Before You Ask(묻기 전에 필요한 모든 것)'이라는 방향성으로 마케팅을 전환하며, 사회적 용인 가능성을 확보했다.


결국 우리는 다시 개념으로 돌아오게 된다. ‘능력’이라는 말은, 방향성을 가진 힘의 조합이며, 기술과 윤리, 전략, 사회적 수용성 등 다양한 ‘력(力)’들의 복합체다.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된 상태를 다시 ‘능력’이라 부르는 것이라면, 이는 중복된 개념일 수 있다. 왜냐하면 능력은 그 자체로 ‘방향성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클루얼리는 속임이라는 출발점에서 능력이라는 도착점에 이르렀다. 그 여정은 논란으로 시작됐고, 기술로 확장됐으며, 결국은 시장에서의 수용이라는 ‘사회적 능력’으로 귀결되었다. 이처럼 오늘날 기술 스타트업의 성공은 단지 기능이나 성능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성과 수용 가능성을 갖춘 ‘복합적 능력’의 문제다. 클루얼리는 이러한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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