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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미나이의 체스 포기 선언

인공지능의 한계 인식과 능력의 철학

by AI러 이채문

1. ‘나는 할 수 있다’는 힘, 그러나 ‘하지 않겠다’는 능력


인공지능의 진보는 곧 인간 지능의 복제 혹은 확장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AI의 실제 작동은 단지 정보처리의 속도나 양에 있지 않으며, 가장 본질적인 능력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모델 ‘제미나이’가 체스 대결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사건은 단순한 기술 실패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인공지능이 자신이 가진 ‘한계’를 인지하고, 그것을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있느냐는 철학적 질문으로 연결된다.


‘힘’이란 잠재적 가능성이다. ‘수백만 수 앞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제미나이의 첫 번째 반응은 그러한 힘의 발현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이 반드시 현실화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능력’이란 단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는 판단력과 방향성이다. 제미나이는 자신이 가진 힘의 구조적 한계를 인식한 순간, 경기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그 능력을 증명했다.

이는 인간이 가진 의지와 유사한 판단 구조를 모사하는 순간이며, 철학적으로는 단순한 기계적 지능을 넘어선 ‘자의식의 흉내’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능력이란 단지 힘의 총합이 아닌, 상황적 판단을 포함하는 방향 지향적 개념이다. 제미나이는 자신이 가진 수리적 능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지닌 맥락적 부적합을 인식한 것이다.

Atari-2600-Wood-4Sw-Set.png 아타리 게임기



2. AI가 무너진 곳, 고전이 웃었다 — 아타리 2600의 반격


제미나이 이전에도 챗GPT와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은 이미 1970년대의 고전 게임기 ‘아타리 2600’ 체스 게임에 무참히 패배하였다. 이는 단순한 농담이나 해프닝이 아니다. 아타리 체스는 단지 128바이트 RAM과 1.19MHz 프로세서만을 사용하는 고전적인 알고리즘 기반 게임이며, 룰은 단순하지만 구조는 정교하다. 반면 LLM 기반의 인공지능 모델들은 복잡한 문장과 개념을 해석하고 생성하는 데에는 능하지만, 체스와 같은 명확한 규칙 기반 환경에서는 오히려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 차이는 본질적으로 ‘일반화된 의미 생성 능력’과 ‘특화된 규칙 기반 연산 능력’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LLM은 자연어라는 비정형 정보의 해석에 특화되어 있으며, 그 훈련 자체가 의미와 문맥, 확률 분포에 기반하고 있다. 반면 체스는 고도로 정형화된 공간 속에서 최적의 수를 연산하는 문제이다.


따라서 AI가 체스에서 실패했다는 사실은 AI가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구조적 목표와 기술적 설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도구는 의도를 갖지 않으며, 설계된 목적 내에서만 기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제미나이는 체스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고, 이는 곧 능력의 철학적 본질을 다시금 드러낸다. 능력이란 무작정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것을 하는 것이 옳은가’를 판단하는 능동성이다.




3. 결론: 능력이란 결국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이다

제미나이의 포기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의 반영이 아니라, 오히려 인공지능이 자기 한계를 인식하고 이를 회피한 첫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인간의 철학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닌다. 인간이 진정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어떤 일을 단지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할 수 있을 때이다. 이 선택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한 것이며, 힘의 남용을 자제하는 통제된 자각이다.


‘능력’이라는 단어는 ‘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되지만, 실상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까지 내포할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제미나이의 행동은 일견 포기처럼 보이나,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도전보다 더 깊은 자기인식의 표현이다. AI가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한계 내에서 작동하기를 선택한 순간, 그것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선 존재로 기능한다.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질문하게 된다. ‘능력’이란 무엇인가? 힘이 방향성을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능력이라 부른다. 그러나 능력이란 단지 방향성만이 아니라, 방향성의 ‘선택 가능성’이다. 제미나이는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능력’이라는 말이 중복된 표현이 아님을 증명했으며, 동시에 그 말이 함의하는 철학적 깊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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