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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Jul 29. 2021

인터넷뉴스의 댓글이 보기 싫습니다

성급한 혐오의 시대

언제부터였을까, 인터넷 뉴스를 떠올리면 '혐오'라는 감정이 따라붙었다. 무료함에 반사적으로 기사 몇 개를 터치하게 되는 날은 어김없이 속이 메슥거린다. 그 아래에 토해진 댓글들은 더 그렇다. 온갖 진부함을 뽐내며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고 조롱하는 문자 모음과 그 옆의 추천 수는 내 자그마한 인류애마저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화면 너머의 그들을 모두 저급한 이들이라 단죄하려는 순간, 이 즉각적인 내뱉음이 자극을 대하는 방법 중 얼마나 쉬운 편에 속하는지 떠올리게 된다. 판단을 미루고 그 너머의 일을 상상하는 것보다 익숙한 마음의 길로 미끄러지는 것이 얼마나 간편한가. 보통 그렇게 산다. 나라고 다를까 싶다.




  인내력도 체력처럼 소모되는 자원이다. 안 그래도 거친 생활에서 견뎌야 할 게 많은 사람들은 이런 내뱉음이 자연스럽다. 잠깐의 숙고도 피로하여 가장 쉽고 빠른 길에 감정과 행동을 맡기곤 한다. 일상의 오지랖과 핀잔, 알량한 평가와 혐오들은 모두 그 길에 걸쳐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무래도 이 길의 종착지는 불행이 되겠다.


  반대의 길을 찾자면 저항뿐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자아도취나 파괴가 목적이 아닌 제대로 된 저항은 곧 사랑 자체이다. 사랑이 저항이라니, 낯선 조합이지만 곱씹으면 그보다 잘 어울리는 단어가 없다.


  사랑은 지금까지 마음을 맡겨둔 관성을 멈추고 기꺼이 거친 길을 향하며 불편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저항이다. 아이의 울음을 틀어막기보다 그 필요를 고민하고, 가족과 연인의 가시 돋친 말에는 그 뿌리에 패인 상처를 발견하는 것. 우는 이웃이 있다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춰 공감하고 연대하는 것이 모두 그런 것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서정적인 제목의 책도 있다지만, 나는 정말이지 흉악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삶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 사랑하는 것이 특별한 일이다. 사랑, 곧 저항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프기 때문이다. 이 아픔의 견딤은 신이라 해도 강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신이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가르쳤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신은 편히 앉아 '사랑이란 이런 거야'라고 가르치지 않고, 인간과 같은 자리에서 애통하며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젠 인터넷 뉴스의 댓글들에 구역질하기보다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사랑하기엔 너무 지쳐서 혐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감싸고 싶다. 그렇게 더 나은 세상을 묵묵히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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