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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Feb 13. 2022

그리스도인의 정치의식에 대하여

느닷없이 혼나고 있는 이대남의 호소

  언제나 시대와 사회상을 꿰뚫는 감정의 분위기가 있다. 보통 베스트셀러에서 발견되는 이 분위기는 내가 기억하는 한 '꿈', '노력', '자존감' 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아무래도 분노와 관련된 감정들이 느껴진다.


  분노는 곧 갈등이며 정치와 쉽게 결합한다. 터질듯한 사회적 분노는 정치 과잉의 시대를 이끈다. 대형 출판사의 베스트셀러에도 전직 대통령, 현 대통령 후보 등 정치인에 대한 책이 유래 없이 가득하다. 우리 사회의 에너지가 모두 정치판을 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도 사회에 속해 있으니 이런 에너지의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와 관련해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지 않다. 그리고 소위 종교 지도자의 말과 글은 순종이 익숙한 신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선거를 앞둔 정치인이 어색한 모습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도 이런 영향력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사회에 해악이 되는 경우는, 이들이 정치인을 신의 자리에 놓는 것이다. 지는 쪽은 감옥에 간다는 현재의 극단적인 정치판에서는 이러한 자리의 전치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생각을 그의 말에 일치시키고, 그의 선하심을 설파하며, 함께 신앙할 것을 촉구한다. 그가 공격을 받으면 '그는 그럴 사람이 아니다' 따위의 반응으로 고난의 투쟁을 함께한다.


   사람을 아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어쩌면 영영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눈 한번 마주친 적 없는, 방송과 기사 몇 편으로 접했을 뿐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그러나 그들에 대해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아는 것처럼 변호하는 믿음은 어떤 성서에서 나온 것인지 알 길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와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어느 누구도 우상화하지 말라는 것일 것이다. 우상화, 곧 인간을 신격에 놓는 일은 곧 자의적인 선과 악의 구분이며, 에덴의 죄와 맞닿는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그 누구도 완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신앙인이 취해야 할 자세다.


   그들과 다른 지점에 있는 한 세대를 욕하는 것과, 불경한 사상을 좇는 사악한 이들, 또는 미성숙하여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라며 단정 짓는 것은 세상 모두가 하고 있는 손쉬운 것이다. 세상에 가득한 부조리의 원인을 나와 대적하는 다른 이들에게 전가시키는 짓이다. 그리스도인이 달라야 할 지점은, 세상 속 진영의 스피커가 아닌 창조주의 관점에서 이 땅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고자 더 많은 이들의 마음과 현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우리 독일 교회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의 사귐을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물음은 절대로 중요하지 않다. 교회는 유대인과 독일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드는 곳에 있다. 바로 거기에서만 교회는 여전히 교회인지 아닌지가 판명된다." 100년 전 위대한 신학자 본회퍼의 대답은 현대 한국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상을 독일인과 유대인, 남과 여, 청년과 장년, 지지 정당 등으로 이분하는 일은 넓게 실재하는 부조리함을 외면하는 행위이다.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해롭고 악하다. 마주하는 모든 이들을 나와 같은 피조물이자 자녀로, 세상의 부조리에 억압받는 이들로 생각할 때에야 교회가 성서의 가르침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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