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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Apr 26. 2022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에 관하여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

몇 년 전 나가사키 여행 중 하시마섬(군함도)을 방문했었다. 일제 말기, 열악한 탄광에서 조선인의 강제징용이 이루어지고 많은 이들이 죽어간 곳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의 역사를 감추고 일본 근대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곳이다. 유네스코는 섬의 강제노동 역사를 포함하여 전시할 것을 조건으로 지정했으나 결국 조건은 지키지 않은 채,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지, 선착장에는 한국어가 유창한 직원이 있었다. 그는 우리 일행에게 한국어로 '섬 내에서는 질서를 지켜주시고, 플래카드 등은 반입할 수 없으며 돌발행위는 자제해달라'는 안내를 하고 동의를 구했다. 역사적으로 민감한 장소인지라 소동이 자주 발생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도선에서 틀어준 홍보영상에는 섬의 지질학적 형성과정에서 바로 20세기 중반의 일본 근대화를 강조한 내용으로 이어지며, 식민지 조선인의 수탈 과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섬에 들어서서도 조선인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은 전시로에서 멀찍이 벗어나 있었다. 재일교포로 보이는 직원은 한국어로 곳곳을 소개해주었다. 넌지시 강제징용의 흔적을 묻자, 본인도 그 내용이 빠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표정에서 부끄러움이 묻어났다.


   안내를 따라 섬의 중앙에 이르렀을 때, 중년의 한국인 무리가 모여들어 태극기와 피켓을 꺼내 들었다. A4 용지로 만든 피켓에는 매직으로 ‘일본은 조선인 강제징용을 사죄하라’는 문구가 한글로 적혀있었다. 한국인 담당 직원이 난감해하며 제지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구호를 외쳤다. 두어 번의 구호를 외치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은 뒤, 태극기와 피켓을 주섬주섬 집어넣었다. 어느 지방의 광역의회에서 나온 이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국인이면 함께 하자며 손짓했으나,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선뜻 발이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선착장부터 동행한 한국인 담당 직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절하고 역사의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국인의 소동으로 그가 어떤 불이익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더군다나 손에 든 피켓은 한글이었으며 외친 구호는 한국어였다. 불의의 주체인 일본 정부가 아닌, 말과 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현지 관광객과 직원을 괴롭히며 벌이는 위력 행사였다. 섬 내에서 돌발행위를 벌이지 않겠다는 동의를 하고, 얌전히 배에 올라탄 후,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섬의 중앙에 이르러서야 겨우 관광객들과 가이드 앞에서 펼치는 소심한 행동이었다. 공직자라고 밝힌 만큼, 공식적이며 더욱 효과적인 길이 충분히 있음에도 그저 사진 몇 장을 얻기 위한 가장 쉬운 행동이었다. 여기에는 용기, 정의감 같은 단어보다 누울 자리를 보며 발을 뻗는 지질함이 더 어울렸다.


   그 자리에 있던 일본인들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를 구호를 외치고, 직원의 손을 뿌리치고 호통치며 태극기를 펼쳐 든 장면을 보았을 뿐이니, 한 명의 시민으로서는 우리가 그토록 알리고자 하는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여지가 전혀 없다. 오히려 반한 감정이 완강해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빅토르 위고가 말했듯, 정의는 그 안에 분노를 가진다. 정의에서 나오는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가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은 분노는, 특히 약자를 향한 불똥은 오히려 진보의 동력을 꺼뜨린다. 사회적 분노는 충분히 숙고된 방법과 방향으로 발산해야 한다.




   나는 매일 아침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계약직 노동자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은 나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노동자다. 사회적 분배에 대한 권한을 지닌 사람은 극히 드물다.


   최근 이들의 일상에 변화가 얹혔다. 장애인 권리예산 편성을 위한 시위라고 했다. 비장애인들에게 잠깐의 불편을 겪으며 장애인들이 겪은 평생의 불편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했다. 첫 지하철 시위 때에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그 절박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의 선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몇 달간 반복되자 말단의 사회초년생은 지각에 대한 해명을 고민하고, 계약직 노동자는 근태로 인한 고용불안을 겪어야 했다. 대학생은 모처럼의 대면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다가 중간고사를 놓쳐 교수의 선처를 구해야 했다. 몸이 약한 시민은 평소의 몇 배나 되는 인파의 압력에 구토하고 실신했다. 이제 시위 중단의 조건이 새 정부의 장애인 권리예산 편성 약속이라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관심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보다 더 큰 여론의 관심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치는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는 것이며, 시민들의 오랜 투쟁을 통해 합의된 자리가 있다. 민주주의의 적법한 절차는 정의를 위해 불완전한 이성을 보완하는 안전장치로 존재한다. 그 절차에 따르면 예산편성은 국회와 정부의 소관이며, 사회적 분배에 대한 요구는 이제 그들을 향하는 것이 옳다. 지하철의 시민에게는 요구를 들어줄 힘과 권한이 없다. 그러니 ‘정부’가 약속하지 않으면 불특정 다수의 ‘시민’에게 괴로움을 주겠다는 방식은 어떤 당위성을 지닌 행동이어도 용납하기 어렵다.


   그들이 투쟁의 공간 삼은 곳에는 권력자와 관료가 아닌 자차를 보유하지 못한 서민이 있다. 그중에는 사회초년생과 저소득 노동자, 비정규직 등 사회적 장애를 지닌 이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들에게 신체적 비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괴로워서 내뱉는 신음에 쉽사리 혐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약자를 살피자는 가치에 역행한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마음을 겨우 붙잡고 글을 쓴다. 사회를 이루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는 존중되어야 하며, 특히 약자의 목소리에는 더욱 귀 기울이는 것이 정의의 관점에서 옳다. 그리고 정의는 무엇보다 그 방법에서도 정의로 때 그 이름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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