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연애관이 통용되는 것 같다. '성경적'이라 불리곤 하는 그 연애관(이하 '성경적 연애관')이란 대체로 각자에게는 오래전부터 예비된 짝이 있으며, 그 짝을 찾도록 기도해야 하며, 짝이 아닌 이들과의 연애는 헛되거나 부정하다는 것이다.
짐작하듯이 나는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상당히 해롭다고 느낀다. 신과의 수직적 관계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수평적 관계에 대한 관심, 그리고 주체성을 희석해버리기 때문이다.
그간 내가 접한 여러 '성경적 연애관'에서 예비된 짝을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것은 오직 더 깊은 신앙심이었다. 이성적 끌림, 닮은 취향과 가치관, 성품,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모두 그 신앙심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멀리해야 한다. 혹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도만 있으면 인간적인 노력은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은 멀리 있지 않다. 청년은 오직 신앙을 갈고닦아 운명의 상대를 '발견'해야 하며, 그 발견의 목적은 결혼이다. 이렇듯 성경적 연애관은 근본적으로 결혼에 대한 매우 큰 기대감, 의무감과 함께한다.
결혼이 일생에서 중요한 사건임은 분명하지만, 이처럼 과도하게 큰 비중은 부작용을 부른다. 결혼이 사랑 가운데 자연스럽게 거치는 사건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인 이상, 다른 모든 과정을 이에 맞추게 되기 때문이다. 이성을 만나기 시작할 때 그가 결혼에 적합한 사람인지를 먼저 고려한다. 그 과정에서 신앙심과 배경, 성품이 내가 생각하는 결혼의 기준에 적합한지, 즉 예비된 사람으로 볼 수 있는지를 계산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결혼을 위한 수단이 된다.
내가 믿기로, 사랑은 감정의 발산보다 큰 개념이다. 성서의 언어를 빌리면 사랑은 신의 가르침이며, 신의 속성이며, 신에게 가까워지는 행위이다. 여러 철학자와 정신분석가의 언어를 빌리면 사랑은 인간의 주체성이며, 심리적 책임이며, 성숙의 과정이며, 실존 그 자체이다. 나의 해석으로는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위해 본능을 거슬러 손해 보고 양보하는 자기 비움이다.
'성경적 연애관'에서는 사랑에 담긴 이 모든 개념이 휘발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비되어있다고 믿는 상대를 찾으며 관계의 주체성을 잃고, 관계에 동반되는 책임을 잃는다. 결혼식의 선서로 사랑이 완성되었다고 믿으며 일생에 걸친 자기 비움과 성숙의 모든 과정을 던져버린다. 사랑에 대한 깊은 고민과 실천이 없이 신앙을 어떻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미국 복음주의자의 혼인율이 표준보다 월등히 높음에도 이혼율에는 차이가 없다는 통계도 의미심장하다.
‘소유냐 존재냐’로 유명한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결의, 판단, 약속’으로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한순간에 빠지는 감정이 아니라 관심과 훈련, 집중이 필요한 삶의 능력이며, 그 끝은 자아도취의 극복과 상대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이다. 성경적 연애관이 이와 차이를 둘 이유가 있을까. 나는 오히려 이 인본주의자의 사상이 ‘성경적 연애관’보다 오히려 성경에 더 가깝다고 느낀다.
결혼식 주례사에 갇힌 사랑론이 해방되어,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는 '사랑적 연애관'이 삶에 흐르기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 고린도전서 13: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