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인들이 유행어처럼 내뱉는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청년'이다. 흐린 기억으로 그 시작을 되짚어보면 지난 서울시장 재보선쯤부터였던 것 같다. 정치적 세력이 형성되니, 앳된 얼굴을 한 정치인이 다수 등장했다.
90년대에 태어나 서른을 바라보는 나는, 청년 정치인이 청년을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인을 대변할 노인 정치인이, 중년을 대변할 중년 정치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물론, 정치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잊혀지는 소수자를 대변할 사람이 필요하다. 장애인의 필요는 장애인 정치인이, 이주민의 필요는 이주민 정치인이 가장 잘 알 수 있다는 명제에는 특별히 반박할 구석이 없다.
그러나 '청년'이라는 세대는 너무나 필연적이며, 광범위하고, 가변적인 집단이지 않은가? 청년은 아동, 청소년을 지나 모든 인간이 거치는 시기다. 어떤 계급, 계층, 직군을 막론하고 청년의 시기를 거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빠짐없이 장년이 된다. '우리가 여기 있다'라고 목청을 외쳐야 하는 집단의 성격이 아닌 것이다.
교육 문제 해결을 위해 학생을 대변인으로 세우지 않는다.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빈자를 대변인으로 세우지도 않는다. 사회 전체가 감당할 문제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년이 겪는 여러 문제도 특수집단의 필요가 아닌, 사회 모두의 보편적 문제다.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국가라면 청년을 대변한다는 정치인이 없어도 그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다른 모든 당위성을 제쳐두고서라도, 단지 사회의 유지를 위해서도 그렇다.
그런데도 '내가 청년을 대변하는 청년 정치인'이라거나, '우리 당은 청년 정치인을 데리고 있다'고 경쟁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는 이제껏 청년 문제를 방치한 이유는 단지 청년 정치인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제는 청년 정치인이 왔으니 모두 해결될 것이라는 기만이다. 이렇게 기득권에게 간택된 청년 정치인이 많아질수록 청년 문제는 더욱 방치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보기 좋은 청년의 대변자보다 '젊은 정치인'이 필요하다. 나이뿐 아니라 생각이 굳고 노욕에 빠진 이들을 들이받을 젊은 생각의 정치인 말이다. 사회 전반에 끼어있는 때를 벗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청년 악세사리가 아닌 젊고 날카로운 생각이다.
이 와중에 내가 청년이오, 내가 청년의 마음을 알고 있소, 하는 이들이 속속 고개를 들고 있다. 무너지지 않을 기둥에 줄을 대어 연명하는 이상, 미래를 팔아 현재와 과거를 먹여 살리는 일에 동참하는 이상, 생물학적 나이는 젊을지 모르나 본질은 이미 널리고 널린 늙고 무딘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다.
김영삼은 26세에 당선되어 이승만에 맞섰고, 86세대라 불리는 민주화 세력도 30대에 당선되어 군부독재에 맞섰다.
우리 세대에도 이와 같은 젊은 정치인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