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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Mar 15. 2022

허경영이 4위 대선 후보인 건에 대하여

대통령 선거 이후의 상처와 낭만


온 나라를 광풍에 휩싸이게 한 20대 대선이 끝났다. 이번 대선은 유독 역대 최고, 최다, 최소 등의 기록들이 가득하다. 우선 승자와 패자의 득표차가 약 24만 표, 0.7%에 불과하여 역대 최소 득표율 차이를 기록했다. 당선인은 역대 최다 득표수를 얻었으며, 공교롭게도 낙선한 후보 또한 역대 낙선 후보 중 최다 득표수를 얻었다고 한다. 두 후보의 지지자들 모두 어느 때보다 필사적으로 투표장에 나간 것이다.


   낙선한 후보의 지지자들은 특히 절망이 깊어 보인다. PTSD가 아닌 PESD(Post Election Stress Disorder)라는 단어까지 등장했다. ‘선’을 선택한 47.8%에 합류하지 않고 ‘악’을 선택한 48.6%에 대한 힐난이 가득하다. 한 세대, 한 성별에 대하여서는 특히 더 거세다. 네거티브로 과열된 선거의 상흔일 것이다.




   나의 절망은 다른 지점에서 터져 나왔다. 3위 후보의 득표율이 고작 2.37%며, 허경영이 0.83%의 표를 얻으며 4위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14명의 입후보자 중 거대 양당과 제3당에 근접한 유일한 인물이 양주에 하늘궁을 건설하고 신도를 모으며 기행을 일삼는 사이비 교주라는 것이다. 5위부터 마지막 순위의 모든 득표율을 합쳐도 이 한 명을 넘지 못했다. 지난 19대 대선만 해도, 5위 후보의 득표율은 6.2%로 유의미한 수준이었다.


   군소정당들의 궤멸적 득표율이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 다양성과 낭만이 소멸했다는 것이다. 이제 세상은 정확하게 양분되어 내 편과 네 편만 존재하게 되었다. 제3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행위는 이적행위로 간주되었다. 빨강과 파랑 사이의 넓은 중첩 지대가 사라지고 단순하고도 분명한 선으로 경계 지어졌다. 단색의 무지개는 아름다울 수 없다.


   무엇보다 두 개의 큰 기득권 덩어리에 붙지 않은, 돈키호테와 같이 풍차에 돌진하는 이상주의자를 더 이상 볼 수 없을까 두렵다. 이념을 실현할 후보(그가 누구이든 간에)에 대한 표심을 상대 후보에 대한 낙선 의지(ㅇㅇ만은 절대 안 돼!)가 가뿐히 이기는 정치지형에 가슴이 조여 온다.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배제와 후퇴의 정치는 개표 전부터 일찌감치 시작된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상을 잠시 미루고 타협에 줄 서는 것은 어느 시점에서나 진보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혹여 진보정당이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뜨거운 가슴이 아닌 무수한 타협과 굴복, 이합집산으로 인한 것이라면 진보의 승리가 아닐 것이다.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이상을 외치는 후보가 유의미하게 부상했다면, 그가 보수적인 후보일지라도,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존재다. 도무지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 당장 유용성 없는 것을 쓰고 노래하는 게 작가의 사회적 역할이다.


   김규항 작가가 엊그제 남긴 단상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 우리 사회에서 작가의 낭만을 지켜낼 수 있을까. 절망스러운 날에도 색을 잃지 않기 위해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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