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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Apr 12. 2022

폴란드 출장기(상)

답답할 땐 해외를 추억하기

몇 년 전, 기업교육에 몸담았을 때 출장으로 국제선에 오른 적이 있다. 외교부에서 의뢰한 재외공관의 조직문화 개선 프로젝트였다. 마침 부서의 고연차 직원들이 모두 살인적인 프로젝트에 매어 있어서 선임급 한 명, 입사동기 한 명과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첫 번째로 방문한 공관은 바르샤바의 주폴란드 대사관이었다.


   LOT 폴란드 항공의 보잉 787을 타고, 폴란드인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11시간을 비행했다.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장거리 비행이었다. 이코노미석인지라 넉넉히 책을 볼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와인 두 잔과 함께 눈을 붙이니 곧 몽골쯤에 있었고, 무료함에 영화를 틀었다가 다시 잠들고 일어나니 바르샤바 '쇼팽' 공항이었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

   국제공항에 세계인이 들으면 알만한 이름을 적어 놓는 것은 단지 문화적 패권의 상징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딱딱한 발음의 폴란드어 기내방송 속 '쇼팽'을 듣는 순간, 낯선 하늘에서 느낀 반가움에 마음이 한층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짐을 찾아 게이트를 지나니 한인 직원이 피켓을 들고 마중을 나와있었다. 곧장 바르샤바 외곽의 호텔로 향하며 소비에트풍의 평평한 거리를 훑었다. 시야가 트였고 하늘도 맑았다. 호텔에 내린 후 한인 직원은 다음날 아침 호텔로 픽업을 오겠다고 한 뒤 떠났다. 호텔은 여타 동유럽의 건물처럼 크고 각졌다. 4시쯤이었다.


바르샤바의 건물들
바르샤바의 거리



   저녁은 네이버에 바르샤바 식당을 검색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식당(Zapiecek)에서 피에로기와 슈바인학센, 굴라쉬를 시켰다. 동행한 사무관은 음식의 생김새를 보고 만두와 족발이라 불렀다. 그럴듯하게 닮았으나 더 짜고 기름졌다.


피에로기와 슈바인학센


   다음날 아침, 약속한 시간에 나와 승합차에 올랐다. 운전자는 현지인 직원이었다. 대사관으로 가는 길에 알려주지 않았으면 지나칠 건축물을 소개해주었다. 거대한 총리 관저와 그보다 큰 러시아 대사관이 기억난다.


   대사관에서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대사를 접견했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대사는 선한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파견 직원들의 외로움과 어려움을 나누고는 좋은 시간을 당부했다. 마침 추석을 지낸 직후였는데, 한인 직원들을 위로하기 위한 관저 만찬에도 초대했다.


   접견을 마친 뒤 공관 직원은 점심식사를 위해 근처의 폴란드 가정식 식당으로 안내했다. 메뉴판은 폴란드어로 적혀있었으며, 식당 주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공관 직원은 외식을 하게 되면 그날그날 주방장에게 'for your recommended'를 말하고 운명에 맡긴다고 했다. 우리도 별 방도가 없어 직원이 먼저 주문한 뒤 'same thing, please'로 주문했다. 나온 것은 역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수프였는데, 색이 무려 보라색이었다.


보르쉬

   주방장에게 미안하게도 스푼을 쉽게 뜰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동행한 직원도 조금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성의를 보아 한 스푼을 입에 넣으니, 이국적인 시큼함과 고소함이 조화된 맛이 느껴졌다. 이국적이란 말은 많이 정제된 표현이다. 삼키기 어려웠다.


   나중에 찾아보니 비트 뿌리와 양배추, 콩, 사워크림으로 만드는 '보르쉬'라는 동유럽 국민음식이었다. 보라색은 비트에서, 신 맛은 사워크림의 것이었다. 반쯤 비우고 숟가락을 놓으니, 견과류가 들어간 브라우니가 후식으로 나왔다. 이건 다행히 익숙한 맛이었다.


(계속)

Zapiecek
바르샤바의 거리
바르샤바의 거리,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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