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분홍색 꽃잎이 흐드러졌다가 이내 낙화한다. 한 계절을 온통 설렘으로 이끌고 나서는, 이 주도 채 가지 않아 어린 잎새들에 자리를 내어주었다. 꽃잎은 밟히고 썩게 되었으나 나무는 여전히 고아하다.
피고 지는 모든 순간이 찬사로 기억될 수 있을까. 수목들은 어떻게 가장 화려하고 생명력이 차오르는 때에 물러나는 법을 아는 것일까. 해마다 새로운 꽃을 틔우고 또 죽이며 흔들림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나무 앞에, 한 번의 절정을 향한 뒤 하강하는 인간의 삶을 생각한다.
서른 즈음에는 노화가 시작된다고 했던가. 아직 제대로 피워내지 못한 인생이 곧 죽음의 초입에 닿을까 하여 불안으로 침식한다. 누군가 비유했듯 인생이 계절이라면, 울창하지 못한 여름과 맺지 못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어도 살았다 할 수 있을까. 사실 대부분의 인생이 그러한데 말이다.
나무줄기의 중심부, 심재(心材)는 생명 기능을 다 한 죽은 부위다. 온 힘을 다해 나무를 밀어 올리고는 보이지 않는 중심부에서 나무를 지탱한다. 죽은 심재를 골격 삼아 표피는 더 크고 두껍게 생장하여, 뿌리로부터 꽃과 잎, 열매를 위한 생명력을 길어 올린다. 그러니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 죽는 동시에 살아난다. 나무의 삶과 나무의 죽음은 구분되지 않는다(김훈, 내 젊은 날의 숲 中).”
나무는 노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늙음으로 내면을 채우며 끊임없이 새로움으로 피부를 갈아엎는다.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한 번의 겨울이 지나면 더욱 단단해진 중심으로 자기를 지탱한다.
어떻게 살고 싶느냐 묻는다면 나무처럼 살겠다 답하겠다. 내 안에서 쓸모를 다 한 기억과 감정, 호기들은 죽도록 내버려 두고, 그들을 골격 삼아 신선한 생명력으로 덮어내고 싶다. 눈부신 한 번의 절정보다 반복되는 겨울을 견디며 조금씩, 은은히 거대해져 끊임없이 새로운 꽃을 피워내고 싶다.
엊그제까지 붉었던 꽃잎들이 이제 남김없이 밟혀져 그 색을 잃었지만, 어김없이 돌아올 내년을 기대한다. 오늘은 나무가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