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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Jan 05. 2023

어느 날 찾아온 서른에 부쳐

불안과 기대 중 많은 것들이 마주하는 시점에 허무하게 느껴지곤 한다. 만져지지 않는 막연한 것은 더욱 그러기 쉬운데, 내겐 특히 '서른'이라는 나이가 그렇다.


   김광석 씨의 탓인지, 서른 하면 다 자란 어른의 완숙함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은 부모님이 구아방(2세대 아반떼)을 몰고 3살 터울의 동생을 병원에서 데려온 나이다. 스물의 설렘과 달리 서른이란 이름에는 책임과 성숙, 어른이 되어가는 불안이 담겨있었다. 나의 그런 상태가 상상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언젠가 존재는 하겠지만 세상의 종말처럼 현재의 나와 상관없거나, 닥치게 된다면 나는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다소 피터팬스러운 인식을 가졌다.


   물론, 당연하게도, 드디어 서른으로 불리게 되었고 닷새가 지났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혼자 살고, 침착맨의 농담에 낄낄거리며, 자가용이 아닌 수비드 머신을 사고 뿌듯해하고 있다. 단지 전보다 밤을 새우기 힘들어지고 순대국밥을 즐기게 되었을 뿐이다. 겉으로 봐서는 정말이지 어떤 다름도 찾을 수 없다.


   사실 삶의 많은 시간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스물, 서른, 마흔 등이라는 시간의 이름에 따라 무언가 극적인 변화를 상상하고 걱정하지만, 생각보다 '나'는 연속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스물아홉의 나와 서른의 나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아마도 서른아홉과 마흔의 경계도, 그다음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무빙워크에 서서 움직이듯 나이를 떠 먹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을 움직이며 만들어가는 사건이지 않을까. 사실 큰 변화는 이미 몇 년 전 일어났다. 스물여덟에는 직장인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배움과 연구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전에는 얼굴의 붉어짐을 무릅쓰고 어느 집단을 품어보고, 권위 있어 보이는 이들과 논쟁하기도, 팽팽한 자아를 늘어뜨려 타자를 사랑하기로 결심도 했다.


   나의 부모가 부모 되었던 것도 나이가 찼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인 것이며, 서른과 마흔과 쉰에 이르기까지 나의 모든 선택도 그럴 것이고 그러기를 바래본다. 천체가 몇 바퀴 돌 때마다 저절로 돌아가는 자연이 아닌, 생기와 의지로 가득한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에 붙은 이름보다 내게 주어진 의지와 선택이 소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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