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작은 아이
언제 한번 밥 같이 먹어요
'언제 한번 밥 한번 먹어요' 또는 '언제 한번 술 한잔 해요'라는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쌍두마차 급 멘트가 있으니 바로 '연락할게'라는 전화 마무리 인사이다. 왜냐고? 절대 밥 안 먹을 것이고 또 연락 안 할 거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나에겐 그냥 냉정하게 보이기 싫어서 하지도 않을 일을 말로 약속하는 사회생활하는 사람들끼리의 비겁한 거짓말 같이 들린다. 직장 생활 오래 하면서 하도 거짓말을 많이 들어서 내가 꼬인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가 '오늘 술 같이 먹어요'라는 말을 내가 친밀하지 않은 직장 상대에게 갑자기 한다? 흠.. 정말 내키지 않기에 나에게 높은 수준의 미션이다. 왜냐하면 언제 한번 먹자는 말도 부담 끼칠 것 같아서 하기 싫은데, 오늘 당장 먹자는 것은 계획되지 않는 약속인 것이고, 상대는 얼마나 대답하기 불편할까 하는 생각 때문에 정말이지 하기가 꺼려진다.
반항
바로 이 시점이다. 사람마다 내적으로 반항하는 포인트는 아마 다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밥 한번 먹자는 번개 멘트가 식은 죽 먹기 급도 안 되는 일상일 테지만, 나의 경우는 바로 이 포인트를 가장 못 견디고 못하고 내 안의 내가 가장 저항하는 시점이다. 거절 미션을 스스로 창작하다 보면 바로 이렇게 내가 어떤 것을 잘 받아들이고, 어떤 것을 잘 받아들이는지 못하는지를 무서울 만큼 현실적으로 드러내 준다.
오늘 나는 거절 미션을 창작하면서 나 자신이 남의 시간을 뺏는 것에 대한 부담과 상대가 나를 싫어할 것 같다는 두려움을 알아차렸다. 흠. 도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마음이 팩트가 아니고 어쩌면 내가 만든 망상일지도 모른다고 알아차리기로 했다. 그냥 하기 싫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원래부터 있었을 것은 아닐 테다. 내 마음 저 안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었다. 저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고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며 물어봤다.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나는 일인 다역을 자청해서 계속 물어봤다. 한참을 찾아 들어가니 마음 저 안에서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드디어 들린다.
'나 사실 친하고는 싶은데 거절당하는 게 두려워'
(왜?)
'부끄럽고 상처받을 것 같아'
(왜?)
'음.. 속상하니깐 상처받겠지. 그리고 다시 얼굴 보면 불편할 것 같아서 부끄러운 것 같아.'
(음 불편하고 부끄럽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럴 만 해)
'그리고 어차피 혼자도 나는 잘 살아. 이런 거 때문에 괜히 일 만들어서 불편해지는 게 싫어.'
(왜 싫어?)
'불편하면 더 자신이 없어지니깐. 나의 평판 깨뜨리는 게 두려워.'
(그렇구나. 두려웠구나)
'.... 응.. 두려웠어.. ㅜㅜ.... 그런데 나는 사실 친하고 싶기도 해..'
(아. 그래?)
' 그냥 이 참에 거절 미션 핑계로 말이나 한번 해보고 거절당할까?'
(그럼. 좋지. 도와줄게. 바로 해보자)
한참의 질문과 생각 끝에 나는 내가 저항하는 그 마지막 포인트를 나는 내 안에서 찾게 되었다. 스스로 찾고 인정을 하고 나니 그 작은 목소리가 사실은 스스로 도전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알아차려주고 나니 신기하게도 저항하는 큰 목소리들이 스르륵 사라졌다. 억누르면 그렇게 못하게 하더니 다 들어주니깐 알아서 사라진다. 이제 다음은 나의 몫이다. 나는 마치 의술의 힘을 빌리듯이 거절 미션의 힘을 빌려서, 내가 적진으로 들어가 주체가 되어 거절을 당해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생각처럼 행동은 바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도전
어느 덥고 피곤한 날이었다. 퇴근길이 많이 막혀서 집 앞에 도착하니 배도 많이 고프고 집에는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날은 아이들 밥 당번도 아니어서 더더욱 바로 들어가기가 싫었다. 배고픔과 자유 부인의 본능이 드디어 오랜만에 내 두려움을 누르고 올라왔다. 바로 지금이다. 정신 차리고 두려움 거인들이 달려들기 전에 바로 전화 버튼을 눌렀다.
'뫄뫄님, 지금 뭐하세요? 저랑 맥주 한잔 안 하실래요?'
평소 속으로는 좋아하지만 친밀하지 않은 분께 연락했다. 아마 놀랐을 것이다. 그분은 안타깝게도 지금 막 식사 시작했다며 다음을 기약하셨다. 나 역시 당연한 거절이라고 충분히 납득했다. 다소 즉흥적이었던 거절당하기 미션은 (당연히) 성공하였다.
결과
결과는 거절에 당연히 성공했다는 재미없는 김 빠지는 시나리오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행하고 그 후의 나의 내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이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어서 그런지 마음은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졌다. 거절당한 그 저녁 나는 집으로 들어갔을까? 아니다. 그날은 내가 그렇게도 집에 들어가기 싫었는지 그 길로 그냥 혼맥을 하러 갔다. 한번 거절당하니 또 누군가에게 전화하기에는 내 기력이 다해서 그냥 내려놓고 편하게 기분 좋게 혼자 먹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뫄뫄님 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제는 아쉽다. 미리 연락했으면 저녁 안 먹었을 텐데. 다음에 또 번개 생각나면 연락해'
우와. 그분은 내가 한 말이 빈 말이 아니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저 상황이 안돼서 거절했을 뿐이었다. 내 말을 그저 부담스러운 빈말로 여기지 않고 다음 날까지 생각해주는 마음에 감사했다. 언제 같이 밥 먹자는 말이 빈 말이라는 설정은 역시 그저 내 머릿속 허상이었을 뿐, 타인에게도 같은 명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그 말은 내가 생각한 것처럼 부담스러운 말이 아니고 오히려 기분이 좋거나 고마울 수도 있는 거야.
반가워. 내 작은 아이야
팀 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안다. 당장 시작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p44'
맞다. 나에게 두려움은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정말 여러 개의 철문으로 가두었고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는 작은 목소리로 나가고도 싶어 했었다. 몰라줘서 참 미안했다. 나는 여전히 문 밖 세상이 다소 무섭지만 그래도 나는 거절 미션을 등에 업고 하나씩 하나씩 그 문을 열어보는 시도도 해보고 때로는 열릴 때도 있고 때로는 다시 못 열때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렇게 시도해보지 않은 근육을 키워가며 내 작은 소중한 아이의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잘 들리게 자주 찾아갈 예정이다.
이번 거절 미션은 결과가 아니고 기획 과정에서 의외의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나를 위해 하고 싶은 일만 할 것이라는 미명 하에 내 캐릭터를 고정하며 살아왔는데, 사실 알고 보니 나는 하기 싫은 일을 피하기만 하면서 나 자신을 점점 더 한 곳으로만 딱딱하게 굳혀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작은 내 목소리는 더 힘이 없어졌고, 힘을 내려고 해도 두려움 거인들이 아우성쳐서 지레 시도도 못 한 채 외롭게 살았던 것이다.
책이나 영상으로 화자의 메세지를 접하면 우리는 그 당시는 이해 하더라도 사실은 소화하지 못한 채 오래가지 않아 완전히 개념 자체가 내 몸에서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많이 해 보았을 것이다. 반면에, 거절 미션은 책이나 영상을 그저 습득하는 것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완전히 내 세포 속으로 체화하여 짧은 시간에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묘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만드는 것이라는 게 핵심 키이다. 내가 만드는 건데 하다가 싫으면 당연히 안 해도 된다. 그런데 내가 한번 이걸 깨트려보고 싶은 마음이 들면, 한번 나 자신이 나만의 영화 창작 작가이자 감독이 되어 미션을 세팅하고 내가 오롯한 주인공이 되어 경험해 보며 심지어 내가 평론가가 될 수 있다. 거기에다 글이라는 기록 장치로 나의 뇌를 움직여서 복기를 하고 공유한다면 화룡정점이 되어 이미 내 몸은 과거와 완전히 다름을 분명히 느낄 것이다. 이번 미션처럼 그 변화는 시나리오 창작에서 터질 수도 있고, 후기에서 터질 수도 있고 어쩌면 결과에서 터질 수도 있다. 밑져야 본전일 뿐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단순한 나만의 이벤트였는데 정말이지 나는 나 자신이 후벼 파 지며 탈피하는 느낌이다.
언제 한번 밥 먹어요
'언제 한번 밥 먹어요'라는 말은 더 이상 나에게 비겁한 거짓말이라는 부정적인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고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 언젠가 나는 그 분과 미리 약속을 꽉 붙들고 만나서 신나는 찐 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좋고 그렇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건 내 마음속 작은 목소리를 찾아가고 그게 어떤 아이일 지어도 그저 따뜻하게 물어보고 들어주는 게 더 우선이라는 나의 생각의 탈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