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글로리 하도영의 신발
한동안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에 빠져 살았다.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나에게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하도영이 문동은의 집 안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찰나의 장면이다. 하도영은 문동은에게 가학적인 학교폭력을 저질렀던 박연진의 남편이다. 하도영이 처음으로 문동은의 영역인 집 안으로 들어갈 때, 그는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직전에 들어왔던 박연진은 신발채로 방 안으로 당연스레 들어오고 피우던 담배를 방바닥에 비며 뭉갠다. 그 모든 장면을 문동은이 CCTV로 확인하고 있다. 문동은은 자신을 망가뜨린 박연진에 대한 복수심 하나만으로 성인이 될 때까지 치열하게 모든 것들을 준비해왔다. 그런데 오로지 복수심 밖에 없던 문동은이, 그토록 망가뜨리고 싶던 박연진에게 다가가서 자신에게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사과하면 복수를 멈추겠다고 단 한번 기회를 주게 된다. 왜 갑자기 먼저 용서의 기회를 주는 걸까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생을 복수를 준비해왔으니 이제 실행만 하면 되는데, 왜 문동은은 갑자기 가해자에게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할 기회를 준 것일까? 그건 사실 알고보니 하도영이 신발을 '벗고' 문동은의 방 안으로 들어간 장면을 CCTV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말 못하는 꼬마도 부모에게 배우는 기본적인 '예의'이다. 온 몸이 복수만으로 가득 차 있는 폭발 직전의 문동은에게, 적군의 사람인 하도영이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데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는 행위는 그녀를 살짝 흔들리게 했다. 그리고 그 사소한 흔들림이 박연진에게 사과의 기회를 한번 주게 되는 엄청난 결과로 이어졌다. 그 사소하지만 엄청난 심리 변화의전개가 참 와닿아서 나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며칠이고 진하게 남아있었다.
나는 '인사 공손히 해라.' '어른에게 감사하다고 대답 잘 해라.'라는 말을 어렸을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고, 나 역시 자녀들에게 그런 말을 간간히 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학창시절에 사실 인사를 잘 하지 않았다. 어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자체가 그냥 싫었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소심하게 끝을 흐리며 말을 뭉개는게 익숙해서, 나와 달리 싹싹하고 인사성 밝은 아이들이 뭐가 그리 기분 좋을까 싶어 그냥 짜증났다. 그런데 그 다음 만난 사회에서는,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다나까 말투에 익숙해졌다. 주위에 그런 남자밖에 없던 조직이어서 저절로 군대식 인사를 배웠다. 내 기분이 좋건 싫건간에 상사가 출근하면 '안녕하십니니까'라고 크게 이야기하고, 상사가 집에 갈 때는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18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 그저 그런 인사가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요즘 출근하다 보면 자주 집 앞에서 만나게 되는 이웃이 있는데 내가 인사를 하면 대응은 하긴 하는데 꼭 목소리를 겨우 내며 말을 흐린다. 마치 마지못해 인사를 하는척 하는 학창시절의 나 같다. 그래도 나름 아침에 가장 먼저 인사하게 되는 사람인데, 그렇게 상대를 만나게 되는 하루가 시작되면 내 텐션도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에이, 받아주기도 귀찮은가 보다. 내일은 그냥 나도 무시해야지.' 이런 생각이 들며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장 먼저 앞선다. 누군지도 사실 모르는데 앞으로 얼굴을 마주치면 서로 피할 것 같은 선입견이 생겨버린다.
그리고 회사에 가면 청소하시는 여사님들을 주로 가장 먼저 만난다. 언제나 여사님들은 하이톤으로 인사를 받아주신다. 아니 인사를 받기도 전에 이미 웃음이 얼굴에 피어있다. 그러면 나는 또 거기에 장단을 나도 모르게 맞추며 나도 미소를 활짝 지으며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예쁜 척하는 인사로 하루를 열게 된다. 나는 아주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사실 전혀 모른다. 하지만 내일 또 제일 먼저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마음이 먼저 움직여버린다.
더 웃긴 것은 동물에게 느끼는 감정도 똑같다는 것이다. 회사를 산책하다 보면 야외의 방목장에서 서 있는 말들 중에서 유독 나에게 살갑게 걸어오는 말이 있다. 어쩔 때는 저 멀리서 막 달려오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들은 유독 사람에게 호기심이 많은 녀석이거나, 밥을 먹고 싶어서 막 달려오는 것일 테다. 그럼에도 나는 그 녀석에게 한번 더 눈길을 주고 싶고, 다음에 꼭 먹을거라도 가져와서 줘야겠다고 이미지가 각인된다. 하물며 나에게 호의적인(?) 동물까지도 이렇게 절로 기억이 나고 호감이 가는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빛 갚는다'. '웃는 낯에 침뱉으랴' 등의 오랜 속담과 격언이 있다. 타인을 향해 웃고,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하라는 가르침이 있는 걸 보면 정말 오래 전부터 인류가 깨달은 진리인 듯 하다. 대단하고 복잡한 내용이 아니어서 사실 나는 둔감해 있었다. '예의'라는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남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은 돈 한 푼 들지 않는데도 정말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를 가진 다는 것을 자꾸 망각한다. '예의'는 나의 첫 인상을 상대에게 무의식적으로 각인시킬 수 있는 엄청난 비밀 병기다. 가령 내 행태가 최악이었다 해도, 웃으며 인사하는 것을 오랜 시간 반복하면 분명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왠만큼 희석될 것이라는 비과학적이지만 확실한 믿음이 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우리를 보며 그저 웃고 관심을 가져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내가 타인에게 존중받고 이해받는 사람이구나라는 안도의 기쁨의 뿌리가 잠재적으로 형성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우리는 타인이 나에게 예의를 차려줄 때 안도하고 빗장을 슬며시 푼다. 그건 정말 별거 아닌 것부터 시작한다. 조금은 더 밝은 인사, 조금은 더 웃는 모습, 조금은 더 친절한 말투로 타인을 대하는게 사실은 자신에게 엄청나게 큰 이득으로 돌아온다는 진리를 드라마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이득을 보기 위해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예의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슬며시 말랑하게 주물러주고, 그 사소한 침투가 결국 엄청나게 큰 긍정과 행운을 끌어당긴다는 생각이 든다.
문동은이 평생을 건 복수를 포기하고 기적적으로 상대의 화해 기회를 주게 한 바로 그 포인트다. 그저 신발 벗고 방안으로 들어갔을 뿐인 '예의'있는 하도영 '덕분에' 그녀는 가해자에게 말도 안되는 귀한 기회를 하사했다. 안타깝게도 가해자 박연진이 뻥 차버렸지만 말이다. 나 역시 살아가며 내가 지은 크고 작은 죄들이 어딘가에서 쌓여가고 둥지를 틀어가려 할 때, 내가 차린 '예의' 덕분에, 그 화의 불씨가 조금은 누그러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타인에게 밝게 웃으며 인사하기 뿐이다. 그래도 요즘은 청소 여사님 덕분에 아침에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걸 절로 습득하게 되어서 감사하다. 정말 인사와 웃음은 전염되는 것 같다. 이렇게 사소하지만 긍정을 이끄는 포인트를 잡아가는 매일 매일의 일상이 쌓이다 보면 결국 엄청난 행운이 다가올 것을 나는 그저 느낌으로 믿는다. 인생은 이성적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 신기한 마법의 영역이 있으며, 그 핵심 중 하나가바로 예의의 영역이다.
*사진출처: 넷플릭스 드라마 더글로리 파트2 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