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자주 드나드는 sns 플랫폼은 다양할 것이다. 요즘은 주위를 보다 보면 특히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 틱톡 같은 숏폼 영상이 대세인 것 같다. 그중 인스타그램은 가장 접근이 편하고 나를 표현하기 쉬운 개인 sns인 것 같다. 인스타스토리는 빠르게 나의 일상을 드러내며 공감을 유도할 수 있다.
나 역시 sns 속에서 살아간다. 나에게는 지금 이 공간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다.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쓰기가 편하기도 하지만, 우습게도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한몫한다. 가끔 남들이 어디에다 글을 쓰는 거냐고 물어볼 때가 있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쓴다고 답을 하지만, 대부분 이 공간을 잘 모르고 내 글을 찾는 수고로움을 하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나는 글 읽기를 자처한 사람만 남은 이곳이 편안하다.
왜 안 오지?
짐작건대 앞서 말한 곳들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일 것 같다. 시각과 청각을 만족시키며 흥미로운 영상이 짧은 시간에 쏟아지는 숏폼 수십 개가 차려진 밥상과, 글만 빽빽한 이 공간은 당연히 다르다. 릴스만 들어가도 형형 색색의 대문들이 움직이며 제발 나를 클릭해 달라고, 내가 더 재미있을 거라고, 내가 더 웃길 거라고 호객하고 있다. 나도 모르게 클릭했다가는 어느새 계속 따라 흘러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정말 재미있으니깐 말이다. 그곳은 파티장 같다. 유명인의 화려한 일상을 훔쳐보는 것도 매력적이다. 정지우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책 제목이 이 모든 걸 한 줄로 설명한다.
글쓰기의 절망과 어두움
반면에 글은 다르다. 글쓰기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처음과 다른 곳으로 뻗어나갈 때가 많다. 그러다가 깊숙한 내면에 빠져서 슬프거나 화가 날 때도 있다. 어쩔 때는 내 마음을 제발 알아달라며 생떼를 쓰는 글을 쓰기도 한다.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가장 돋보이고 예쁜 표정을 지으며 최고의 순간을 남기려고 애쓴다. 하지만 글쓰기는 다르다. 사회생활 때문에 예의 바르고 나이스한 모습만 골라서 가공해서 밖으로 보여주는 집 밖의 삶과 달리, 글쓰기는 모든 겉옷을 벗고 화장을 지운 내 몸체다. 내 안에 있는 못나고 감추고 싶은 재미없고 어두운 흉터와 기미까지 나는 글쓰기에서 용케 찾아내고 알아주게 된다.
끝도 없이 들어주는 글쓰기
글을 써내려 가다 보면 나는 끝도 없이 말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내 글은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하는 나를 한없이 들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상대를 신경 쓰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꺼내도 괜찮다고 하니, 나는 그 안에서 내 다채로운 색깔을 꺼내며 비로소 자유롭고 편안해진다. 요즘은 살면서 내 생각의 흐름에 집중하며 사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꽤 어렵다. 세상에는 너무 볼 것과 알아야 할 것이 넘쳐나서, 가만히 있으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줄도 모르고 그냥 구경 모드로 내 생각을 잠그고 살기가 너무나 쉬운 세상이다.
그럴 때 그 소용돌이에서 나오기 위해서 나는 키보드를 두드린다. 내 안의 절망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도 하고, 왜 이렇게 기분이 거지 같은지 끝까지 내 마음을 들어준다. 생각의 꼬투리를 잡아서 막 따라 올라가다가 글이 산으로 가도 상관없다. 그게 내 의식의 흐름이고 그렇게 마구마구 자유롭게 생각을 기록하며 내 의식이 글과 동기화되는 그 순간 드디어 나는 스스로 깨닫게 되며, 그제야 내 옆에 지나가는 폭우 속 강물 같은 화려한 물살을 보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내 기준을 움켜쥐게 된다.
나에게 소중한 것
기준을 찾다 보면 대부분 나에게 소중한 것을 확인하는 행위로 종결된다. 글을 쓰며 내가 일상에서 가치롭게 여기는 생각을 더 적어 내려 가며 기록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올해 나는 ‘말’과 ‘제주’ 이야기를 특히 많이 쓰고 있다. 그 이유는 그만큼 현재 내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연극 ‘온 더비트’에서 아드리앙은 ‘음표가 소중한 것은 언젠가 사라지기 때문이에요’.라는 말을 한다. 영원하고 지속적일수록 우리는 당연시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말(horse)을 치료하는 역할이 언제 바람처럼 사라질지 나는 모른다. 나는 인사발령에 종속되어 있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토록 기다리고 준비했던 지금 이 순간을 그렇게 기록하려고 애쓴다. 마치 그토록 원하는 여행 스폿에서 마구 사진을 남기는 사람처럼, 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는 말수의사의 삶과 그 과정 속의 치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잊지 않고 싶다.
당신에게 소중한 것
하루를 마무리 하며 글 한 줄을 무조건 써야 하는 이상한 나라에 산다고 가정해 본다. 그곳에서 모든 사람은 무조건 한 줄을 써야만 잠을 잘 수 있는 법이 있다. 그렇다면 각자의 머릿속에서 어떤 한 문장이 뽑아져 나오게 될까? 아마도 그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각이나 사건, 그리고 기억에 남는 관계들에 대한 것일 테다. 글을 쓰지 않더라도 모두의 머릿속에는 가장 중요한 그것이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글로 만들어 지면서부터 그것은 형체를 띠며 더 선명해진다.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처럼, 글은 사라질뻔한 내밀한 순간이 친절하게 박제된다.
남의 시선을 끄는 사진이나 영상에 자랑거리만 있는 것과 달리, 나에게 숨겨진 소중한 절망과 고민들도 글에서는 끄집어낼 수 있다. 바로 그 지점이다. 나는 글쓰기가 내 안의 나도 모를 절망과 혼란스러움을 찾아 들어가기 가장 최적화된 행위라는 생각도 든다. 글쓰기는 신기하게도 솔직할수록 더 주목받고 공감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날것의 다양한 감정을 보다 자유롭게 끌어내는 걸 허용받는다. 필요한 건 드러내는 용기와 서서히 익숙해지는 것뿐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소중한 것을 박제시켜 주는 수단으로 쓰였고 그러다가 점점 친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이미 더 소중해져서 어쩌면 내 눈코입 같은 일부분이 되어버렸다.
글쓰기에는 절망이 있다. 나는 글을 쓰다가 찾아낸 나만의 소중한 절망을 드디어 발견하고 사유하고 처리하는 시점에서 쾌감을 느낀다. 나의 하루, 내 삶의 마무리 한 줄은 아무래도 그곳에 있고, 때로는 타인의 한 줄을 공감하며 나를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