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나이에 관한 이야기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갑자기 결혼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져서 자꾸만 초조해져. 나도 상대를 만나려는 노력을 안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이렇게까지 인위적인 만남으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면서까지 상대를 찾아야만 하는 걸까? 정말 결혼적령기 안에서 퀘스트 깨듯이 상대를 꼭 찾아내야 하나?'
나는 이런 질문에 답하기가 너무나 곤란하다. 왜냐하면 나도 끝이 어디인지 모르는 어딘가를 걷고 있는, 단지 약간 앞서 걷고 있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이다. 내가 걷는 길의 끝이 꽃길인지 지옥행인지 나도 아직 모른다. 정답이 없는 인생 속에서 불안을 해소하려면, 어쩌면 대다수의 선택지 안에 나도 들어가는 게 가장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자꾸 누군가에게 확인해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도 그랬다.
그렇다면 남들 다 결혼하는 나이에 결혼하고, 남들 다 출산하는 나이에 아이를 낳고, 남들 다 보는 결혼의 물질적 조건을 선택하는 게 가장 안전한 것일까? 정말로 나와 나이가 같은 모든 사람들의 선택을 점으로 찍었을 때 나오는 표준 정규분포 그래프의 가장 두터운 중간 범위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일까? 나의 경우를 돌이켜보니, 사실 나는 그 범위 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아니었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것이 일상적인 한국 사회에 살다 보니, 내 정보를 노출하면 선입견으로 불편해지는 경우가 많아서, 먼저 나를 굳이 드러내지 않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별난 기본정보를 나열해 본다. 나는 또래보다 무척 일찍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도 비교적 일찍 낳았다. 남편과의 나이 차이는 무척 벌어진 편이다. 그러니 분명 중간범위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불안정한가? 아니다. 스스로의 나를 중간 평가한다면 나는 현재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살아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객관적으로 평범하지 않지만, 정작 나 자신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40대 기혼 워킹맘인 나에게 어린 누군가 결혼과 나이에 관한 조언을 구한다면 정작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가 과연 그런 조언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이런 삶을 살아가는 나인데도, 감사히 내 조언을 구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바로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분명히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빠를수록 좋다'는 것이다. 결혼에 나이가 중요한지를 물었는데, 갑자기 나 자신을 찾아내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어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 자신이 어떠한지 모르는 사람이, 결혼이라는 거대한 방향키를 제대로 조준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내가 어떤 형태의 사람인지 배워나갈 여유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10대의 가장 큰 고민은 학업과 친구 관계일 것이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다고 설득하는 선생님이 있을 정도로,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시절이 가혹하게 길다. 풋사랑을 시작해 보는 시기에 공부만 파는 친구도 있고, 보다 어른의 연애를 시작하는 친구도 있다. 드디어 성년이 되면 이제는 조금 더 본격적인 자유가 주어진다. 모든 제한은 사라지고 연애, 알바, 게임, 술자리, 취업 준비 등 뭐든 할 수 있지만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혼란스러운 20대는 생각보다 쏜살같이 지나간다. 만인에게 환영받는 20대의 여자는 당장의 즐거움을 누리기에도 충분한데, 결혼과 출산이라는 미래는 굳이 생각하기도 싫고 조금만 더 미뤄두고 싶다.
바로 그 때다. 나는 타인에게 개방된 그 찬란한 10대와 20대의 시절이, 나 자신에 대해 촘촘히 알아내고 다져야만 하는 중요한 나이라고 생각된다. 나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랑을 원하고, 어떻게 상대를 사랑하는 것에 행복을 느끼며, 이별에는 어떻게 대처하는 사람인지 알아야, 나의 결혼관과 배우자상이 공고해진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나만의 경험 만이 내 취향을 알아갈 수 있다. 어린 시절 부모나 또래 친구 정도의 작은 사회를 넘어서, 성인이 되어 만나는 수많은 사람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나의 모양새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내가 어떤 요철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많은 상대와 부딪치면서 어떨 때 잘 맞고 어떨 때가 상극인지 점점 더 세밀하게 깨닫게 된다. 그것은 한 방향의 미디어 습득이나 온라인 비대면 교류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요즘은 휴대폰 하나만 있으면 무인도에서도 거뜬히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즐거움과 쾌락을 주는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데, 굳이 아픈 사랑과 이별에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내 맘대로 따라오지 않는 관계에 시간 낭비 하고 싶지 않고, 내 성취나 물질적 가치를 위한 노력이 더 건설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점점 더 그렇게 미디어가 몰아가는 끝없는 비교 속의 자본주의 세상이다. 하지만 내가 죽을 때 후회하는 게 과연 무엇일까 생각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찾는다. '더 올라갈 걸.' 보다는 '더 잘해줄 걸.'이라는 후회를 한다고 한다. 내가 가치롭게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결국 관계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결혼에 있어서 어떤 점을 중요시하는지, 과연 어느 정도의 사랑이 결혼을 확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될지 알기 위해서는, 결국 나와 상대만의 세상 속에서 얻는 경험 뿐이다.
그게 꼭 연인 관계가 아니어도 좋다. 선후배와의 관계, 동료와의 관계 등 타인과 나의 관계를 보며 내가 어떤 포인트에서 정말 행복감을 느끼고, 어떤 포인트는 절대로 용납이 안되는지 깨달을 수 있다. 중요한건 타인의 시선에 끌려가지 않으며 나 자신의 모양새를 찾아내고 사유해 보며, 결국 내가 지속하고 싶은 관계, 내가 원하는 삶을 지속해서 그려보는 것이다. 만약 내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면, 만남과 이별이 아무리 아프고 두렵고 포기하고 싶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관계 속으로 또다시 손을 내밀어보고, 또 내미는 손을 두려워하지 말고 잡아보고 싶다. 혼자만의 소통과 실체 없는 온라인 모래성에 소모했던 아까운 시간들은 다시 돌아간다면 주워 담고 싶다.
이른 주말 아침 출근길에 꼭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 시간에 아이와 축구공을 가지고 나가는 아빠다. 주말에도 어김없이 아침 일곱 시 삼십 분에 아이와 함께 축구장에 가는 그 이웃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주말 아침에 일어나기 싫은 마음을 이겨내고 기꺼이 일어나서 선뜻 함께 나가는 그 근원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내가 손해 보는 것 같은 마음보다는, 내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이 드는 그 순간은 늘 오지 않는다. 그 보석 같은 순간이 오면 꼭 곱씹고 기억하며 그 행복을 탐구하며 더 그려내야 한다. 그런 마음이 들 때, 내가 어떤 순간을 정말 사랑하는지 알아가는 게, 결국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그런 나의 진정한 마음이 닿는 그 순간을 조각조각 모아가다 모면, 나 자신의 색깔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색이 어떤 상황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잘 어우러지는지를 파악하고 있다면, 결혼 적령기라는 용어에도 더 이상 초조하지 않고 보다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사실 여전히 오락가락하고 있다. 40대 기혼 워킹맘인 나는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건 한 끗 생각 차이다. 내가 맞다고 확신하면 맞는 거고, 내가 틀리다고 확신하면 틀린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일 것이라고 나 스스로가 확신하기까지의 그 지점까지 오려면, 결국 나 자신을 찾아내는 수많은 관계 속 경험들이 하나하나의 디딤돌일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곧 나를 사랑하는 근거가 되며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좋은 것은 몸에 쓰다. 한 방향의 나만의 편한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쌍방향의 불편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부지런히 찍어 먹어 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지옥불이 아닌 꽃길로 가고자 하는 나만의 인생과 결혼과의 관계를 스스로 조준할 것이고, 드디어 결혼과 나이의 끝도 없는 논쟁에 초연해져 있는 나 자신이 되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