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머피의 법칙같은 '김과장의 법칙'이 있다. 현재 4명의 수의사가 근무하는 우리 병원은 돌아가며 당직대기 근무를 선다. 퇴근 후에도 응급 전화가 오면 전화에 응대해야 하는 의무이다. '김과장의 법칙'은 내가 오래간만에 저녁 약속을 하는 당일이나 다음날에 꼭 응급전화가 온다는 것이다. 그날도 그랬다. 평범한 숱한 저녁이 아니고, 화려한 저녁 모임의 여파로 피곤한 다음날 새벽 당직 폰으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이번 주 나의 당직 주간을 알리는 알람 같았다.
"임신한 씨암말인데 어제부터 배를 엄청 아파했어요. 어제 개업수의사 치료에도 호전이 없고 아침에 또 아파해요."
흠. 히스토리를 들어보니 오자마자 수술할 확률이 높은 말 같았다. 부랴 부랴 도착했고, 역시나 응급 개복 수술에 바로 들어갔다. 부푼 배를 절개하니, 엄청나게 부푼 소장 더미가 구겨진 기다란 풍선이 밀려 나오듯이 끝도 없이 나왔다. 기나긴 소장이 서로 뒤엉켜 있었고, 한참을 이리저리 돌리며 풀어내니 저 끝부분에 완전히 썩어서 까맣게 조직이 괴사 된 부위가 1미터 이상 발견되었다.
이곳이 한 바퀴 돌아 제대로 꼬이면서 조직이 썩어버렸고, 그 앞뒤로 음식물이 넘어가지 않고 장은 부풀어가면서 말이 배가 아팠던 것이다. 조금만 늦게 왔으면 전혀 도리가 없었을 텐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문제는 해결 방법이었다. 긴 소장의 중간 정도의 일부 부위가 썩어 있었다면, 괴사 된 부위를 자르고 나머지 멀쩡한 장을 서로 이어 붙이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오늘의 경우는 길쭉하고 얇은 소장과 거대한 항아리같은 맹장이 이어지는 부분이 썩어있었다.
즉 소장과 소장을 이어 붙일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았다. 후배 술자는 소장의 끝을 맹장의 일부와 연결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연결 방법도 장의 절개면 부분이 아니고 옆구리를 터서 서로 잇는 방법 (side-to-side anastmosis)으로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멘토로 모시고 있는 내 후배 술자는 정말 유능하다. 스테이플러 기구를 사용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능숙하게 조작을 하며 장을 이어 붙였고, 나도 최선을 다해 어시스트했다. 수술시간은 제법 걸렸지만 그래도 괴사부위까지 발견이 빨랐고, 접합수술도 무리 없게 진행되어서 한숨 놓았다.
수술이 끝나니, 대기하던 보호자가 "수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나는 "합병증으로 회복이 안될 수도 있으니 감사인사는 말이 퇴원하고 나서 나중에 받을게요." 라고 답했다.
그런데 보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회복하고 말고는 말의 운명이고, 일단 오늘 수술하느라 애써주신 것은 감사한 게 맞죠."
와.. 일하면서 이렇게 감동적인 말을 처음 받아본 것 같다. 최근에 입원마의 이런 저런 합병증 처치로 고생이 많고, 그에 따른 여러 민원성 문제가 많아서 의욕이 자꾸 꺾이는 나에게 정말 오아시스 같은 말씀이었다.
문제는 수술 후였다. 장을 이어 붙이는 까다로운 접합수술을 한 말은 수술을 마친 당일은 컨디션이 괜찮은 것 같았으나, 그 다음날부터 지옥문이 시작되었다. 분명 겉으로는 잘 서있고 조용해 보이는데, 심박수는 너무 높고 호흡도 가빴다. 게다가 장이 움직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복부 초음파를 해보니 소장이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풍선처럼 부풀어있다.
수술 전이랑 똑같은 초음파 영상을 보며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수술 후 합병증 중에 하나인 장무력증 (ileus)이 와버린 것이다. 소장문합 수술의 합병증으로 심심치 않게 온다고는 들었는데, 결국 올 것이 왔다. 장무력증은 나의 휴일당직과 함께 시작되었다. 나 혼자 근무하는 휴일에는 재수술을 할 수 있는 인력 소집이 어렵기에 일단 내가 어떻게든 말을 살려놓아야 했다.
아무리 내과적 처리를 해도 소장은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 따라 내용물이 위로 역류하며 자꾸 위액이 가득 찼다. 그러면 말은 더 호흡이 거칠어져서, 나는 5시간마다 식도에 호스를 넣어서 위액을 빼냈다. 말은 호스를 코에 꽂은 채로 지냈다.
야속하게도 며칠 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하는 말인데도 위액은 시간마다 많이도 역류해서 나왔다. 장운동성을 촉진시켜 주는 약을 포함한 수액처치를 해서 탈수를 막아야 했다. 500kg이 넘는 큰 말이 하루에 위액으로 쏟아내는 양만 수십 리터가 되기에, 이를 교정해주는 치료를 해 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밤샘 수액처치가 불가피했다. 다시 보호자에게 연락을 했다.
"밤에 위액도 빼야 하고, 수액도 맞고, 걷기운동도 시켜야 해서 야간에 도와 주셔야 겠는데요."
보호자는 아무 불평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무조건 해주시는 분이었다. 사실 누구보다 오랜 경력을 가진 그분에게 나는 일개 어린 수의사로 보였을 텐데도, 미소를 잃지 않고 무조건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왔다. 말의 처치에 관해서 욕심이 많은 나는, 야간 조력자가 생길 때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 힘이 난다. 응급으로 내과처치를 해야 하는 말에게, 야간 투약을 못하면, 많은 것들이 악화된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부터 다시 말의 컨디션을 돌아오게 하는 게 곱절은 힘들어져서 야간 집중치료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밤새 말을 돌보는 게 하루 이틀이지 계속 지속 되는 것은 인력면으로도, 비용면으로도 정말 소모적인 싸움이다.
나는 나에게 홀로 맡겨진 2박 3일의 휴일 낮밤은 무조건 말 컨디션을 올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첫 날은 새벽 두 시, 다음 날은 밤 11시까지 수액 처치와 위세정이 계속되었다. 까만 새벽에 머나먼 집에 가는 게 너무 피곤해서 병원에서 자고 싶었으나, 정신 차리고 집에 가서는 쪽잠만 자며 온종일 그 말만 봤다.
사실 그렇게 된 건 나를 따라와 주는 보호자의 힘이 컸다. 나보다 훨씬 연세도 많고 경력도 많은 보호자는 오히려 나보다 더 늦게 가고 더 일찍 오셔서 말을 이미 운동시키고 계셨다. 나는 그 모습이 말에 대한 애착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신뢰로도 읽혀져서, 나 역시 피곤을 숨기며 거기에 동화되어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질주해 버렸다.
하지만 열정만큼 말은 빨리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도 상태가 더 나빠지지 않음에 위안을 하며, 장이 움직이는 그날까지 이런저런 치료법을 공부하고 추가해 가면서 하루하루 버텼다. "내일까지도 이 상태면 다시 재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라며 하루의 마지막날 패배자처럼 주인에게 이야기를 해도, 그저 웃으며 "네. 판단하시는 대로 진행해주세요. 그래서 저는 내일 몇 시에 오면 되죠?" 라며 이야기하셨다. 재수술을 한다 해도 사실 확답이 없고 또 다른 합병증이 올 수 있기에, 내과적으로 말이 다시 장이 움직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말을 재수술해서 혹여나 죽게 된다면 정말 보호자를 볼 낯이 없을 것 같았다.
좀비 같은 기나긴 휴일 주야간 치료가 지나고, 드디어 직원들이 모두 출근하는 근무일이 돌아왔다. 이제는 함께 할 수 있고 내 고민도 나눌 수 있으니 훨씬 힘이 났다. 이틀간 내가 죽는 소리를 하며 다시 배를 열어야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해놓았다. 그런데 마치 내가 양치기 소년이 된 것처럼 직원들과 다 같이 검사한 술후 6일차가 된 날, 드디어 회복세가 보였다. 위로 역류하는 양도 줄어들었고, 움직이지 않는 팽팽한 소장의 영상이 확실히 덜 보였다. 와.. 정말 다행이었다.
말은 정말 느린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이제는 말이 스스로 먹고 그게 똥으로 잘 나오면 된다. 체온만 내리면 되고, 호흡만 좀 낮아지면 된다. 염증만 좀더 잡히면 된다. 운동도 시키고 침도 놓고 어떻게든 장이 움직이도록 도와줬다. 매일 매일 말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먹는 풀의 종류와 양을 조절해 갔다. 글을 쓰는 현재도 그 말은 여러 수의사와 말 관리자가 돌보고 입원 치료 중이다. 다행히 지금은 초반처럼 야간 밤샘 집중 치료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아주 잘 먹진 않아도 그래도 적당히 먹고 똥도 이제 나온다. 아무래도 내가 없어야, 말이 더 건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기나긴 밤이었다. 보호자와 나, 또는 관리자와 나 둘이서 숱하게 위액을 뽑아내며 오늘 하루만 버텨보자고 한 그 쫄리는 날들이었다. 이 밤의 끝을 잡고 하루만 하루만 하며 생을 연장한 말이 건강하게 퇴원하는 그날, 나는 그 많은 밤을 묵묵히 지지하고 지켜준 보호자에게 제대로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마 그날의 감동 멘트보다 임팩트는 약하겠지만, 나 역시 나만의 진심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고 싶다.
내 당직의 법칙은 내가 야간에 잘 걸리는 법칙이기도 하지만, 잘 치료되어 나가는 법칙이기도 하다고 나 스스로는 믿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욕심을 낸다면 뱃속의 태아도 잘 자라서 내년에 무사히 순산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다음에 혹시나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나는 이번 경험과 연습을 계기로 같은 케이스가 왔을 때 능숙하게 집도해볼 수 있는 그 날을 여전히 희망해본다.
*사진과 글은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