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 있는 게 가장 편하다. 누구라도 옆에 있으면 신경을 써야 하는 게 영 성가시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혼자 근무하는 날에는 콧노래 부르며 출근한다. 혼밥, 혼술 따위는 땡큐다. 혹시 내가 어떤 병명으로 불리는 환자로 태어난 건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니면, 긴밀한 친척과 이웃도 없었고, 가족과의 감정교류도 적었던 성장환경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나는 좀 못됐다. 내 생각, 내 안락이 세상 소중하고, 남의 삶에는 관심이 안 간다. 너만 보고 산다는 결혼식 축가스러운 노래 가사, 희생적 노인들 사연에 다들 울 때에도 내 눈만 뽀송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길고양이 움직임에 감정이 움직인다. 그래도 최근, 성격유형검사에서 나도 카테고리화되는 그룹 안에 들어간다는 걸 알았을 때 크게 안도했다.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 또 존재한다는 게 신기했다.
개인주의자가 사회 속에서 살려면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친구 앞에서 착한 척, 회사 동료 앞에서 친절한 척 연기를 한다. 아침에 뭘 물어야 하는지 생각을 해보고, 어떤 제스처가 분위기를 유하게 만드는지 배운 다음, 사회에서 연기한다. 에티켓과 예의라는 명목 하에 항상 눈치를 보며 산다. 그러니 내게 혼자 있는 충전 시간이 없다면 전원이 나갈지도 모른다. 잠을 줄이고 새벽에 일어나서라도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야 하니 말 다했다.
그런 내가 결혼을 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인생 최대의 불가사의다. 남편이 속은 건지, 내가 속은 건지 여하튼 간 우리는 보통의 연애와 사랑을 거쳤다. 결혼 결심의 이유는, 남편은 함께 있어도, 다른 인간들과 달리, 내가 혼자 있는 것만큼 희한하게 편안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쓰지 않아도 사람이 옆에 붙고, 사람 냄새난다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내가 그 옆에 있으면 나도 왠지 그런 사람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하고 맞춰서 평생 살 것이라고 약속했다. 모든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그러하듯이. 그 약속을 한지 올해가 17년째다. 처음엔 서로를 위하고 맞출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동화책의 끝은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행복한 결혼식과 압맞춤의 마지막 페이지 바로 다음 장부터 대하소설급 장편소설이 끝도 없이 자꾸 연재되고 있다. 장르는 더 이상 로맨스가 아니고 내셔널지오그래픽의 동물 다큐다.
서로의 내밀한 성격과 가치관의 차이는 양파처럼 까도 까도 끝이 없었다. 내 개인주의 때문에 남편은 관심 못 받는다고 상처를 입는다. 나는 오히려 남편에게 관심 못 받는다고 상처를 입는다. 서로 원하는 포인트가 묘하게 뒤틀린다. 둘 다 나는 안 바뀌고 싶고 남의 변화만 원하는 떼쟁이 어른들이다.
그러다 결국 합의와 포기 사이 어딘가에서 균형을 맞춘 채로 또 살아간다. 어젯밤 남편은 과음을 했다. 나는 그런 그가 피로할까 봐 솔직히 걱정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간 학습된 대로 적당한 국을 만들어준다든지, 좀 더 쉬도록 오전 살림을 도맡는다. 이전에는 이런 행위를 하는 자체가 싫고 귀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싫지도 귀찮지도 않다. 그냥 한다.
개인주의자의 결혼생활은 이 정도의 적응과 훈련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나에겐 그깟 해장국 하나 만드는 게 별게 아닌데, 남편은 그걸 챙김 받는다고 여겨주고 고마워한다. 그러니 당연히 나는 또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거든. 그래서 일단 잘 맞춰줘야 한다. 결혼을 했어도, 이렇게 내 영역을 사수하려면 눈치와 밀당의 연속이다. 어쩌면 개인주의장 결혼이란 끝도 없는 서로간의 조련 게임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