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태열이 심했다. 붉그레하고 오돌토돌한 뺨이 신경 쓰였지만, 조금 지나면 나아진다고 다들 그래서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태열은 아토피로 변했고, 온몸으로 가려움은 퍼졌다. 아이는 순한 아이였을 텐데, 가려움 때문에 순할 수가 없었다. 밤마다 깨서 울고, 약을 먹이고, 찬바람을 쐬어주고를 반복하며 키웠다.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견으로 온갖 방법을 시도해 보기도 했다. 명의가 있는 대학병원, 한의원을 시작해서 목욕요법, 유기농 요리, 집안 청소법, 온갖 대증요법, 수많은 로션과 크림을 갈아타며 또 몇 년을 살았다. 하지만 치료는 되지 않았고, 곧 천식도 찾아왔다. 네뷸라이져를 달고 살고, 천식 치료용 흡입기를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주며 아이는 유아기를 보냈다.
남편과 내가 분담했던 무수한 졸린 밤들이 이젠 까마득하다. 나는 새벽 두 시에 깨고, 남편은 새벽 다섯 시에 깨는 순번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는 아이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부채질을 해주고, 새벽공기를 같이 쐬면서 그 시절을 보냈다. 지루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또 흘렀다.
유치원 졸업행사에서 아이는 단체로 부채춤을 췄다. 연습 부채와 달리 공연용 부채는 끝에 풍성한 깃털이 붙어있었고, 그날 강당은 꽤 더웠다. 단체 활동이니깐 잘하고 싶었을 텐데, 눈이 자꾸 가려웠던지 아이는 부채를 든 손목으로 눈을 중간중간 비볐다. 그러다 보니 공연 중 따로 노는 커다란 아이의 부채가 티가 정말 많이 났다. 공연장에서도, 이후 영상을 보면서도 가려움을 참다가 몰래몰래 비비는 애가 너무 안돼서 정말 나는 많이 울었다.
우리는 항상 ‘로션 바르기’, ‘편식하지 말기’의 잔소리로 크고 작은 실랑이를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세월은 정직히 흘렀다. 어느새 녀석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고, 이제 스스로 씻고 스스로 로션을 바르게 되었다. 스테로이드 연고도 자기가 언제 발라야 하는지 잘 안다. 천식 치료용 흡입기도 휴대폰만큼이나 항상 잘 챙기고 다닌다. 그래서 점점 내가 간섭할 일은 줄어들었고, 이제는 다행히 성인 아토피의 양상으로 국소적인 부위만 다스려주면 되는 정도가 되었다.
아이가 돌이 되기도 전에 아토피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이 아이가 이 질환을 지금까지 가지고 갈지 꿈에도 몰랐다. 판정을 받았을 때 가장 큰 걱정은 약물 부작용과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놀림받을 것 같은 막연한 우려였다. 하지만 어느새 외모에 한창 신경 쓰는 아이는 다행히 아토피를 마치 본인의 애착 인형처럼 당연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 인지한다. 그리고 지금껏 사용하는 스테로이드 연고에 대한 부작용은 다행히도 현재까지 없다.
곧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식이다. 유치원의 부채춤 같은 행사는 없지만, 그래도 부모들을 초대하는 졸업식을 한다고 한다. 여전히 나에겐 늘 애틋하고 살펴봐야 하는 아이다. 아직도 늘 손의 아토피 상처가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이고, 숨소리를 눈여겨 듣는다. 알러지 음식을 가려먹다 생긴 편식이 고착화돼버려서 늘 짠하다. 그런 내 시선에 반해, 사실 아이는 이미 충분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춘기 소녀가 되어 있다.
밤새 아이를 달래며 여러 사람들의 말에 불안해하며 내가 걱정했던 미래는 오지 않았다. 아이의 현재는 친구들이랑 인생 네 컷 찍고, 마라탕 먹으며 연예인 포카 자랑하는 게 가장 행복한 평범한 아이이다. 물론 가끔 아토피가 얼굴에 도드라지거나, 천식 증상이 나타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아이도, 우리도 예전보다 의연해졌다.
혹시나 성인이 되어 질병이 남아 있더라도, 우리는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아무것도 몰랐던 초보 부모는, 이제 남들의 말에 더이상 휘둘리지 않고 페이스를 찾아가며 삶에 적응을 해 나가고 있다. 그건 무엇보다 쿨하고 강하게 자라준 녀석의 마음이, 상대적으로 불안한 우리를 오히려 안심시켜 주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어느새 아이의 인생에서 벌써 두 번째 졸업식이 다가온다. 아이도 많이 컸고, 부모도 많이 컸다. 이번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정말 활짝 웃으며 응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의 마음에 콕 새겨졌으면 좋겠다.